시라크의 '유별난' 모국어 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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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자크 시라크(사진) 프랑스 대통령이 '각별한' 모국어 사랑을 과시했다. 시라크 대통령은 23일 브뤼셀 유럽연합(EU) 정상회담장에서 프랑스 경제인이 모국어 대신 영어로 연설하자 돌연 자리를 박차고 퇴장해버렸다고 로이터 통신이 전했다.

프랑스인인 에르네스트 앙투안 세이예르 유럽경제인연합회 의장은 처음엔 모국어로 연설을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33개국 39개 기구, 2000만 기업을 대표해 지금부터는 비즈니스 공용어인 영어로 연설하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시라크 대통령은 필리프 두스트 블라지 외무장관, 티에리 브르통 재무장관 등 프랑스 대표단과 함께 곧바로 회의장을 떠났다. EU 정상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연설자가 모국어를 사용하는 것이 관례로 돼 있다.

이 때문에 시라크 대통령은 세이예르 의장이 각국 지도자들에게 "민족주의 성향의 보호주의를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한 대목을 듣지 못했다.

시라크 대통령은 다음 순서인 장 클로드 트리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연설을 시작하고 나서야 자리로 되돌아왔다. 트리셰 총재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ECB에서 거의 영어로만 말한다. EU 정상회의에서는 25개 회원국이 사용하고 있는 20개 언어가 모두 통용된다. 프랑스어는 한때 EU 회의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언어였으나 1990년대 이후 북.동유럽 국가가 대거 신규 회원국으로 가입한 뒤 영어에 밀리고 있는 추세다.

한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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