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도피HR 박종규가 귀종종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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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대권도전 시도가 물거품이 되었을뿐만 아니라 축재자로까지 몰려 좌절을 씹어야 했던 김종필씨는 80년 당시를 회고하며 군부의 집권가능성이 높을수밖에 없는 「한국적현실」을 이야기했다.
군부대 배치문제가 그것이다.
『내가 불과 3천여 병력을 끌고 「혁명」(그는 반드시 혁명이라고 불렀다)을 했을때 장면총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당해야 했지요. 소수의 병력으로도 뭐든지 할수 있는것은 2차대전당시 12명의 영국특공대가 도부룩의 「로멜」 사령부를 습격, 전멸시킨 예드에서도 찾아볼수 있읍니다만 정권도 그런식으로 당할수 있는 겁니다. 국내정정이 한창 어수선할때 「위컴」주한미군사령관과 만적난걱이 있읍니다. 「위컴」장군은 신군부의 움직임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을 걱정하더군요. 그래 내가 웃으며 「방어책임자가 그러면 어쩌느냐」고 한마디 해줬읍니다.
김일성이의 불장난 우려 때문에 어렵기는 하겠지만 2시간이내에 서울에 들어올수 있는 군부대를 두는 것은 곤란하다는 말도 했지요』
언제고 한두시간내 수도서울을 덮칠수 있는 군병력이 있는한 비정상적인 정권쟁탈이 가능하다는게 그의 지론이었다.
김씨는 『어쨌든 군부대 배치는 생각해야할 문제』라고 강조하고 『서울주변의 몇몇 부대장들이 뜻을 모아 결행하면 하루아침에 당할수밖에 없는게 우리의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김씨는 『육본이 대단한 것 같지만 5.16때 얼마 안되는 병력이 한강을 넘어 육본으로 진입하니 마비되더라』며 자신의 경험을 거듭 되새기고는, 하물며 권력을 쥐고자하는 군인들이 서울에 진을 치고 앉아 무력은 물론 정보·수사권을 한손에 거머쥐고 현실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는데다 약삭빠른 인사들이 그쪽으로 가 붙는 마당에 무슨수로 당시의 자신이 집권가능성을 기대했겠느냐고 반문했다.
군대를 동원해 권부에 들어갔던 김씨가 바로 군대 때문에 집권할수 없었다고 개탄하는 것은 분명 아이러니다.
그래서 박정희대통령은 보안사를 통해 「그 가능성」을 항상 체크하지 않았던가.
보안사가 부여받은 업무중 대공·보안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체제수호기능, 즉 쿠데타방지였다. 역대보안사령관은 그래서 수도경비사령관을 비롯한 수도권일원의 부대장 동태를 항상 체크, 대통령에게 보고해왔던 것이다.
JP 그 자신이 당한 것은 부대의 원근과 관계없지만 「변화」의 주체가 군이었던 점은 마찬가지였다.
JP와 함께 구세력의 몰락을 잘 나타내주는게 HR(이후락씨)다.
HR는 국무총리·공화당의장을 지낸 JP못지 않게 제3, 4공화국을 풍미했던 인물이다.
대통령비서실장·종앙정보부장등을 역임한 HR는 화려함에 있어서는 몰라도 실속에서는 JP를 능가했다고도 할수 있다.
그 HR가 10.26으로 정정이 험악해지자 출국해버렸다. 불교조계종전국신도회장이기도 했던 HR은 방콕에서 열리는 국제불교대회 참석을 이유로 출국했다.
이때 계엄사 합수단이 위장출국이라며 여권발급을 보류시킨바 있는데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HR의 출국이 전부터 예정된 것이며 그가 수사대상자도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출국을 허가, 12·12후 한번더 시달려야 했다.
일단 출국에 성공, 밖에서 정세를 관망하던 HR는 정총장마저 제거되자 미국에 주저앉아버렸다.
권력의 속성을 꿰뚫고 있던 HR가 귀국을 미루자 국내의 힘깨나 썼던 인사들도 불안해했다. 사태를 잘 안다고 여겨지던 그의 거취는 분명 예사롭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계엄당국도 그들대로 HR의 도피여부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HR는 정보부장을 물러났을 때도 신변에 위협을 느끼자 비밀리에 출국, 바하마등지에서 머물다 신변보장을 확약받고서야 귀국한바 있다. HR와 같은 거물이 손길이 미치지 않는 외국에 있는 것은 신군부에게 상당히 짐스러운 일이었다.
HR를 더이상 외국에 방치할수 없다고 판단한 신군부는 그의 귀국공작을 벌였다.
여기에는 HR의 사돈인 김종희한국화약회장이 나섰다.
『김회장이 경호실장을 지냈던 박종규의원을 찾아와 이 문제를 상의했읍니다. 박의원은 나중에 그 자신도 부정축재자로 몰려 잡혀가는 신세가 됐지만 이때만해도 신군부의 리더들, 즉 전두환·노태우장군등과 교분을 갖고 있어 돌아가는 소식을 다소나마 알고 있었읍니다. 박의원은 전·노장군이 윤필용사건으로 위기에 처했을때 도와주는등 돌봐주었었거든요. 그렇다고 박의원이 군내 핵심서클인「하나회」의 고문이란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 알고 하는 소립니다. 박의원이 챙겼던 장군들이 득세하니까, 특히 12·12후에는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눈길을 보내기도 했지만 실상 그는 10·26이후계속 난감했읍니다.
10·26이니 12·12니 하는 것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물론 사건이 일어난 뒤에 군관계자들로부터 직접 얘기를 들을 정도는 됐죠. 예컨대 10.26 다음날인 10월27일밤 전두환보안사령관이 삼청동 모처에 있는 박의원을 찾아와 10.26 사건개요를 설명해주어 궁정동에 여자도 두명 있었다는등 남보다 다소 먼저 소식을 들을수 있었지만 말입니다.
얘기가 빗나간 것 같은데, 박의원은 여기저기 알아보더니 HR가 귀국해도 구속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해주었읍니다. 그 얘기를 김회장이 알렸을텐데도 HR는 귀국하지 않았읍니다. 결국 박의원이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아무 뒤탈이 없을 것이니 귀국하라」고 종용, 3월14일에 들어온거지요』 박의원 측근이었던 L씨의 설명이다.
이렇게 해서 귀국한 HR는 당시공화당을 휩쓸던 정풍운동을 비판하면서 소위 「떡고물」파동을 일으켰다.
정풍파는 자기양심에 비추어 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사들은 당직일선에서 물러나라며 구체적으로 개인을 거명했고, HR는 이를 정면으로 받아치는 동시에 김종필총재의 퇴진을 요구하는 폭탄선언을 했다.
HR는 김총재가 정풍파를 「홍위병」으로 삼아 못마땅게 생각해온 자신을 몰아내려 했다고 주장했다.
앞서 언급했듯 JP는 정풍파를 「외부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들로 파악했고, HR는 JP의 사주를 받는 집단으로 보고 김총재에게 화살을 겨누는 웃지 못할 상황이 연츨된 것이었다.
HR는 『정치자금에 관여해서 돈이 많은 것 같은 인상을 받지만 솔직이 말해 다른 사람보다 조금 잘살았을 뿐』이라며 『10년간 놀면서 나도 좀 썼다. 소문난 잔치 먹을것 없다고 실상 나도 별로 가진게 없다. 당국에서 조사해보면 알것이다. 요새 축재의 사회환원이란 말이 많다. 어떤 사람은 사회에 환원했다고 하지만 우습다. 내고향 울산에 공업센터가 생긴뒤 말없이 교육·육영을 위해 울산육영회에 7개 중고교를 만들어 이미 사회환원작업을 해왔다』며 자신을 변호했다. 「정풍」에 대한 HR 「역풍」은 정가에 태풍을 몰고 왔다.
비록 말뿐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행동의 손」을 경계하던 여야는 HR의 이같은 반격이 정풍파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인지, 배후가 있는 계산된 행동인지를 가늠하느라 긴장했다.
HR 발언이 있자 정풍파의 정동성의원은 『HR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베벌리힐즈에 60만달러짜리 호화저택을 갖고 그 근처에 1천만달러짜리 빌딩도 갖고 있다. 호화주택 사진도 찍어왔다. 광주에도 땅이 있고 별장만도 두채가 된다』며 실예를 들어 HR를 정면으로 공격했다.
또 임호의원 같은 이는 김종필총재를 『원천적인 특급권력층 부정축재자』로 규정하면서 『그런이가 새민주시대의 당지도부에 군림하고 있는 현상을 더이상 좌시할수 없다』며 김총재의 퇴진을 요구하는등 자중지난을 연출했다.
쑥밭이 된 공화당은 HR에게 탈당권유처분을 내리고 임호의원을 정리하는 한편 당직개편을 단행, 정풍파의원들이 거명했던 이병희·길전식·육인수씨등을 당직에서 물러나도록 했다. 김진만·박종규의원등은 자진 탈당했다.
당직개편으로 JP체제가 다져졌느니 어쩌니 했지만 왕년의 집권여당은 이전투구의 집안싸움으로 만신창이가 됐다.
서로의 비행을 들춰내며 매도했고 엄격한 언론검열속에서도 이 역겨운 싸움은 사실 그대로 보도될수 있었다. 별도의 홍보가 없어도 국민 모두가 공감할만했다. 제 죽을 무덤을 파고 있는 형국이었다.
아무리 혼나도 할말이 없을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가면서 새 세력에 등장할 명분을, 토양을 제공하기에 열심이었던 셈이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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