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파는 게 아니라 주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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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사진=김성룡 기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좋은 음악을 붙잡으려 '녹음' 단추를 누르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에도 그렇게 녹음하는 이들이 있다. 모두가 잠든 새벽 2시에 전파를 타는 KBS 쿨 FM(89.1MHz) '전영혁의 음악세계'를 듣기 위해서다. 전세계의 '좋은 음악'을 누구보다 먼저 전하는 프로그램. 팻 메시니, 조지 윈스턴, 메탈리카, 주다스 프리스트 등도 '음악세계'에서 처음 소개됐다. 블랙홀은 '새벽의 DJ'라는 헌정곡을 만들고 신해철도 헌정 방송을 내보낼 정도로 전영혁(54.사진)은 수많은 음악인과 매니어에게 영향을 미친 DJ다. 1986년 '25시의 데이트' DJ로 출발, 오는 4월 29일 방송 20주년을 맞는 그를 24일 녹음실에서 만났다.

그는 말이 없는 DJ다. 뮤지션과 곡명을 소개하는 게 전부다. 나머지 시간은 모두 음악이 채운다. 선곡 리스트를 꼼꼼히 짚어가며 직접 CD를 건다.

"연예인이 작가가 써준 대본을 읽고 PD가 밖에서 판을 걸어주는 건 잘못된 겁니다. 음악을 모르는 연예인을 데려다 쓰니 그런 문제가 생기죠."

직접 구입한 음반만 트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음반 구입비는 한 달에 300만 원. 20년간 어림잡아 7억 원이 넘는 돈을 쓴 셈이다. 보통 가정이라면 대판 부부싸움이 났을 터. 그러나 아내는 정성어린 엽서를 보내던 10년 애청자였다. 그는 하루 네 시간씩 음악을 듣는다. 두 시간은 라디오 선곡에, 나머지 두 시간은 선곡 스트레스 없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데 쓴다.

"몇 장이나 팔릴까를 생각하며 만든 곡은 나쁜 음악입니다. 죽기 전에 길이 남을 명곡을 하나 쓰겠다는 마음으로 만들면 좋은 음악이죠. 음악은 파는 게 아니라 주는 겁니다."

음악은 '상품이 아닌 선물'이란 정신을 보여주기 위해 그는 자비를 털어 20주년 기념 음반을 만들었다. CD 4장에 음악세계 애청곡 중에서 고르고 골라 57곡을 넣었다. 오랜 애청자에게 나눠주려고 1000장만 찍은 비매품. 유니버설.소니BMG.EMI.워너뮤직 등 4대 직배사가 모두 기꺼이 음원을 제공했다. 담당자들이 그의 20년 공로를 인정한 것이다.

"판매용으로 만들었다면 돈은 많이 벌었겠죠. 그러나 상업적 외압이 없는 상태에서 음악을 나눠 듣는 게 진짜 음악을 사랑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그 철학처럼 상업성이 없는 방송은 모두가 잠든 시간대에 전파를 탄다. 애청자들이 방송 시간을 앞당기려 방송사에 수차례 민원을 넣어왔지만 소용없었다. 이 방송국, 저 방송국 옮겨다니며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기도 했다. 그렇게 이어온 프로그램은 이달 초 한국 방송프로듀서상 라디오 음악부문 작품상을 받았다. 애청자들은 자발적으로 20주년 기념사업회를 만들고 기금도 모아 기념 도서 발간 등을 준비하고 있다. 다음달 8일 KBS홀에서는 20주년 기념 공연, 희귀 음반 전시회 등의 행사가 열린다. 초대권 신청은 기념사업회 홈페이지(http://mw20th.com)에서 26일까지 접수한다.

"청취율 지상주의에서 살아남은 게 기쁘면서도, 좋은 음악만 방송하는 사람이 저 혼자라 생각하면 외롭고 슬퍼요."

글=이경희 기자 <dungle@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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