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세금으로 국민 협박하고 갈라놓을 것이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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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계층갈등 부추기는 대통령의 세금 인식

어제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에서 피력한 노무현 대통령의 세금에 대한 언급과 판교신도시 아파트 당첨자 전원의 자금출처를 조사하겠다는 국세청의 발표를 보면 세금 문제에 대한 이 정부의 인식이 우려의 수준을 넘어 위험한 상태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노 대통령은 양극화 해소의 재원을 결국 세금을 올려 마련하겠다는 심중의 일단을 피력했다. 그는 "당장 세금을 더 내라는 것이 아니고 한번 연구해 보자"라며 단정적으로 세금 인상이란 말을 피했다. 그러나 "세금 인상이 곧바로 모든 봉급생활자를 봉으로 만들자는 게 아니다"라고 말해 내심 세금 인상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노 대통령은 "(근로소득자의) 상위 20% 소득계층이 근로소득세의 90%를 내고, 절반 정도는 근소세를 전혀 내고 있지 않다"며 "세금을 올리더라도 (봉급생활자의) 50%는 손해 볼 것이 없다는 정도로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세금을 더 걷더라도 상위 20%에게서만 더 거둘 터이니 나머지는 걱정할 것이 없다는 얘기다.

그는 이어 "TV나 신문을 보면 (세금 인상에 대해) 봉급생활자들이 궐기할 것 같아 겁이 난다"면서 "실은 종합소득세의 97%를 상위 20%가 내고 있다"고 했다. 상위 20%의 돈 많은 고소득자만 해당되는 세금 문제를 언론이 온 국민의 부담이 느는 것처럼 부풀려서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세금의 대부분을 내는 사람은 상위 20%에 불과하고 나머지 80%는 어차피 세금과는 무관한데, 이 20%에게서 세금을 더 걷는다고 온 국민이 나서서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참으로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대통령이 국민을 상위 20%와 나머지 80%로 갈라 놓고, 상위 20%에게만 세금을 더 걷겠으니 손해볼 것 없는 80%의 국민은 잠잠하라는 말이다. 아니 80%는 박수를 치라는 말이나 같다. 대통령이 이런 식으로 계층 간 대립과 갈등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무릇 공평과세의 기본은 '국민 개세(皆稅)'의 원칙에서 출발한다. 모든 국민이 소득에 합당한 세금을 내야 한다. 그래야 국민으로서의 책임감도 느끼고, 국가에 정당한 요구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근로소득자와 자영업자의 절반이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세제개편 때마다 소득이 적은 사람도 최소한의 세금은 내도록 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엉뚱하게도 이처럼 불합리한 세제를 오히려 부추기며 국민을 갈라놓고 있으니 놀랍고 두려울 뿐이다.

아파트 당첨자를 탈세범으로 모는 국세청

5월 4일 판교신도시 아파트에 당첨되는 9420명 전원에 대해 취득자금 출처조사를 벌이겠다는 국세청의 발표는 세무조사 만능주의의 극치다. 국세청이 판교신도시에 대한 투기행위를 차단하겠다며 내놓은 초강경 대책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조사는 현실적으로 실행에 옮기기도 어렵거니와 징세권의 남용이라는 점에서 매우 우려된다.

가장 큰 문제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모든 당첨자를 잠재적인 투기 혐의자로 몰아 조사하겠다는 발상이다. 아파트에 당첨됐다는 것이 무슨 죄 지은 일도 아니고, 반사회적인 행위도 아니다. 투기 혐의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사람에 대해 제한적으로 자금출처를 조사하는 것이야 이해할 수 있지만, 모든 당첨자의 재산상태와 금전거래를 무차별적으로 캐겠다는 것은 곤란하다. 국세청이 투기조사를 하는 근거는 탈세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 구체적인 근거도 없이, 마땅히 선량한 납세자로 간주돼야 할 아파트 당첨자들을 탈세범쯤으로 여겨 투망식으로 조사하는 것은 징세권의 심각한 남용이자 월권이다.

도대체 국세청이 무슨 수로 당첨자에 대해 전원 자금출처 조사를 하겠다는 것인지도 의심스럽다. 선별적으로 조사한다면 몰라도 현재의 조사인력으로 근 1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재산상태를 일시에 조사해 투기 혐의자를 가려내기는 무리다. 부동산 잡는다고 엄포용으로 자금출처를 조사하겠다는 것인데 조세징수권이 국민 협박권인가.

*** 반론보도문

본지는 3월 24일자 사설에서 5월 4일 판교아파트 당첨자 전원에 대해 자금출처 조사를 벌이겠다는 국세청 발표가 세무조사 만능주의의 극치라고 보도하였으나, 국세청은 판교아파트 당첨자 전원에 대해 세무조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국세청이 보유한 소득신고자료 등을 통해 일부 탈세 가능성이 있는 사람만 세무조사할 계획이라고 밝혀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