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미ㆍ중에 번번이 참패, 한국 보복관세 19년 흑역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이렇게 굴욕적 협상이면 집어치우고 돌아와야 한다.”(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

2000년 마늘 협상, 중국에 대참패 #미 세탁기분쟁, WTO도 효과 없어 #힘의 논리 지배하는 국제 통상 #강력 보복수단 없으면 늘 패배 #정부, 미국 철강 보복 관세 언급 #하지만 전망에 대해서는 불투명

2000년 여름 정부는 중국을 상대로 한 ‘마늘 협상’에 진땀을 뺐다. 국내 마늘 농가 피해를 막겠다며 그해 6월 1일 중국산 마늘에 2년간 긴급관세(최고 315%)를 부과하는 세이프가드를 발동한 게 화근이었다.

당시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지 않았던 중국은 엿새 뒤 한국산 휴대전화와 폴리에틸렌 수입을 긴급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한국은 두 달간의 협상 진통 끝에 겨우 중국의 수입중단을 원상 복구했다.

3년간 매년 3만2000∼3만5000㎏의 중국산 마늘을 30∼50%의 낮은 관세율로 사오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통상전쟁에서 당한 대참패였다.

미국이 우리나라 철강 제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할 예상인 가운데 21일 오후 충남 당진의 한 공장에 열연코일이 놓여 있다. 김성태

미국이 우리나라 철강 제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할 예상인 가운데 21일 오후 충남 당진의 한 공장에 열연코일이 놓여 있다. 김성태

2013년 2월 미국이 삼성전자와 LG전자가 한국에서 만들어 수출한 세탁기에 각각 9.29%, 13.2%의 반덤핑·상계 관세를 부과했다. 한국 정부는 그해 8월 WTO에 제소했고, 최종 승소(2016년 9월)까지 3년이 걸렸다.

 그 사이에 삼성과 LG는 미국 수출기지를 베트남·중국 등지로 옮겼다. WTO는 미국에 관세를 철폐하라고 명령했지만 미국은 이행 기간(2017년 12월)이 지나도록 아무 조치를 하지 않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달 WTO에 연간 7억1100만 달러(약 7600억원) 규모의 대미 보복관세를 물리겠다고 요청했다. 하지만 미국 측 반발이 커 중재 절차를 거쳐야 한다.

국제 통상은 힘의 논리가 지배한다. 미국의 철강·알루미늄 제품 관세 부과 검토 소식에 이해 당사국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다. 중국은 지난 17일 상무부 성명을 통해 "(미국이) 중국 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최종 감행하면 필요한 조치를 해 정당한 권리를 지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들은 "중국이 보복관세 부과를 검토하고 있다"고 해석했지만 중국 정부는 ‘필요한 조치’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반면에 한국 정부는 중국보다 과감하게 대응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9일 WTO 제소를 직접 언급한 데 이어 20일에는 청와대가 ‘보복관세’ 카드를 정면으로 꺼내 들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WTO 제소 후) 적법한 후속 조치로 보복관세를 취할 길이 열려 있다”고 말했다. 전날 대통령 말처럼 ‘당당하고 결연히’ 맞서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한·중 마늘 분쟁이 계속된 2002년 7월 27일 제주시 종합경기장에서 마늘사수 궐기대회를 마친 제주지역 농민들이 마늘상여를 앞세우고 가두시위를 벌이는 모습. [연합뉴스]

한·중 마늘 분쟁이 계속된 2002년 7월 27일 제주시 종합경기장에서 마늘사수 궐기대회를 마친 제주지역 농민들이 마늘상여를 앞세우고 가두시위를 벌이는 모습. [연합뉴스]

문제는 WTO 제소를 통한 보복관세 부과에 짧게는 3년, 길게는 5년 이상이 걸린다는 데 있다. WTO는 1995년 분쟁 해결 모델을 정립하면서 사건당 최고 두 번의 판결을 받을 수 있도록 설계했다.

공식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한 번 심리에 1년 3개월가량이 소요된다. 하지만 최근 복잡한 국제 무역분쟁이 늘면서 심리 기간은 이보다 훨씬 길어지는 추세다.

앞서 삼성·LG 세탁기 관세 사례에서 보듯 최종심 판결 후 이행 기간(최대 15개월)까지 기다리면 실제 보복관세 부과까지는 5년 이상이 걸린다. 현행법상 국내 대통령 임기(5년)보다 길다. WTO 판결과 국내 정책 판단이 어긋나는 게 남 얘기만은 아니다.

지난해 한국은 일본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을 재개하라는 WTO 1심 판정을 받았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항소했다.

미국 라스베가스 홈디포(Home Depot)매장 세탁기코너 전면에 가득찬 LG전자 스팀트롬세탁기를 소비자들이 살펴보고 있다. [중앙포토]

미국 라스베가스 홈디포(Home Depot)매장 세탁기코너 전면에 가득찬 LG전자 스팀트롬세탁기를 소비자들이 살펴보고 있다. [중앙포토]

송기호 민변 국제통상위원장(변호사)은 “국제법에 해당하는 WTO 제재가 개별 국가의 정책을 강제할 수 있는 효력은 없다”면서 “게다가 지금은 미국이 WTO 규범을 완전히 벗어나 기존의 국제 무역질서를 전혀 따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훗날 WTO가 보복관세 승인을 내주더라도 한국이 이를 실행할 수 있느냐도 의문이다. 한국이 보복관세를 물리면 미국과의 전면전을 각오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강대국을 상대로 한 통상 마찰이 결국 손해만 남긴다고 경고한다.

심상렬 광운대 국제통상학부 교수는 “상대방이 충분히 아프다고 느껴야 비로소 무역보복이 이뤄지는데 한국은 미국이 결정적으로 무릎을 꿇거나 양보를 하게 할 수 있는 수단이 마땅치 않다”면서 “과거 중국과의 마늘 협상에서 겪은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미국, 중국 등 힘이 센 주요국을 상대로 한 무역 보복이 성공한 전례는 없다”면서 “정부가 불필요한 갈등 국면을 야기하면 실익을 얻을 수 있는 협상 타결에서 그만큼 멀어지게 된다”고 조언했다.

세종=심새롬 기자 saero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