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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즈트리·아마벨이 흉하다고? 공공미술 작품엔 두 개의 시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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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1호 26면

[CRITICISM] ‘동시대 미술’ 해석 논란

작년 서울역 앞에 설치됐던 ‘슈즈트리’. 버려진 신발을 모아 만들었다. ‘도시 재생’을 상징한다고 했지만 시민들 반응은 차가웠다. [중앙포토]

작년 서울역 앞에 설치됐던 ‘슈즈트리’. 버려진 신발을 모아 만들었다. ‘도시 재생’을 상징한다고 했지만 시민들 반응은 차가웠다. [중앙포토]

나를 미술평론가로 소개하면, “아 그러세요.”라고 상대방이 끄덕이는데, 그들이 뇌리에 떠올리는 미술과 내가 직업인으로 자주 접하고 평가하는 미술 사이에는 건널 수 없이 넓은 강이 놓였음을 나는 잘 안다. 평범한 일반인이 떠올리는 미술의 초상화는 전 근대기에 발표된 미술이기 십상인 데 반해, 내가 평론의 대상으로 만나는 건 거의 대부분 현대 미술, 더 정확한 용어를 쓰면 동시대 미술이다. 동시대 미술이란 ‘지금 여기’라는 현재 시점에 제작된 미술을 의미한다. 대중 강연 때마다 나는 2010년 전후에 발표된 작품만 선별해서 강의 자료를 만드는 데, 그 이유도 전공자인 나와 일반인 사이에 놓은 강의 폭을 좁히기 위함이다. 강연 중에 나는 자주 이렇게 말한다. “동시대 미술을 여러분이 꼭 알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미술이 아니어도 교양 함양에 도움이 되는 문화 콘텐츠가 너무 많이 있지 않은가.” 그 같은 양해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미술 대중화가 절실하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바로 미술이 사회 문제로 공론화될 때다. 보편적인 시민에게 무관심의 대상이다시피 한 현대 미술/동시대 미술이 모처럼 인구에 회자되는 순간들. 그 순간들이란 미술 전공자와 일반인 사이의 관점의 격차가 가시화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전문가·일반인의 인식 차이] #여론 악화되면 ‘몹쓸 작품’ 낙인 #에펠탑도 처음엔 흉물·철거 논란 #[대중에겐 전근대 미술이 익숙] #‘지금 여기’ 동시대 작품과 큰 거리 #불특정 다수가 호감가질 수 없어 #[표현물에 대한 관용 필요] #대중 눈높이에 억지로 맞추기보다 #작품에 대한 ‘알기쉬운 설명’ 중요

2017년 서울역 앞 ‘슈즈트리’ 스캔들

가장 근래의 순간을 꼽자면 2017년 5월 서울역 앞에 세워진 ‘슈즈트리’ 스캔들이다. 버려진 낡은 신발들로 구성한 작품이 불결하고 지저분하다고 불평하는 어떤 시민의 부정적인 반응과, 1억4000만원이 투입된 작품 제작비에 “내 세금 돌려줘”라고 화답하는 어떤 시민의 인터뷰만 선별적으로 편집한 언론사의 대응으로부터 미술을 바라보는 전공자와 일반인 사이의 진도 차이를 거듭 확인하게 된다. ‘슈즈트리’ 논쟁이 뜨거울 때 한 일간지는 내게 슈즈트리에 대한 견해를 물어왔고, 문제 될 게 없는 작품이라는 취지로 30분 이상 설명했건만, 해당 언론사는 나의 변론을 통 편집한 채 기사를 내보냈다. “‘슈즈트리’는 잘못된 작품”이라는 프레임을 고수하는 게 일반인 독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다고 봤을 게다.

이처럼 미술이 모처럼 인구에 회자될 때면, 뜨거운 중심 무대의 주인공은 거의 예외 없이 공공미술의 몫이다. 평소 전시장을 찾지 않던 이들에게 갑자기 출현한 동시대 미술의 민낯은, 대중이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던 미술과는 너무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특정 작품에 여론이 악화되면, 대중의 공분을 선별적으로 편집한 언론의 대중영합적인 기사가 가세하게 되고, 그러면 논란의 중심이 된 작품은 ‘몹쓸 작품’인양 기정사실화 되는 공식 비슷한 것이 이 사회에 존재한다.

2016년 홍익대 정문 앞에 세워진 홍기하 학생의 과제물 ‘어디에나 있고, 아무 데도 없다’는 극우 누리집 일간베스트의 손 표식을 대형 조형물로 만든 것이어서, 일베의 행패에 평소 불만을 품어온 시민들의 공분을 샀고, 급기야 언론이 이 작품을 둘러싼 논란을 보도하자, 보도가 나간 다음 날 작품은 파손된 채 언론에 등장했다. 작가의 의도야 어떻건 일베 표식을 재현한 조각을 일베 기념비라고 1차원적으로 해석한 의분의 사람들이 작품을 파손한 거다.

2007년 창원시청 민원 빗발치자 ‘작품 철수’

1997년부터 논란이 끊이지 않은 미국 작가 프랭크 스텔라의 ‘아마벨’(서울 삼성동 포스코 사옥).

1997년부터 논란이 끊이지 않은 미국 작가 프랭크 스텔라의 ‘아마벨’(서울 삼성동 포스코 사옥).

2007년 창원시청의 요구로 최정화 작가가 설치한 작품에 민원이 빗발치자 설치한 지 이틀 만에 창원시는 작품을 철수하고 만다. 창원시가 밝힌 철수 이유는 이랬다. “샤머니즘 또는 토템적 색채가 너무 짙어, ‘무당집’ ‘굿판’ ‘성황당’ 같다는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민원 때문에 공공미술이 수난을 겪은 건 20년 전에도 있었다. 삼성동 포스코 사옥 앞에 세운 프랭크 스텔라의 아마벨은 작품이 설치된 1997년부터 지속적으로 시민들의 불평 어린 민원이 쏟아진 대표적인 공공미술이다. 급기야 포스코는 사회적 소음을 잠재우려고 1999년 이 작품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으나, 국립현대미술관 작품수집심의에서 의견이 갈리는 바람에 기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시민들이 철거를 요구한 이유 중에는 작품이 비행기가 추락한 잔해처럼 흉측해서 포스코의 발전적인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내용까지 있었다.

동시대 공공미술에 어떤 시민들이 쉽게 공분하는 이유 가운데에는 해석의 층위가 한 겹뿐인 미술품만 반복적으로 접하면서 성장한 우리 삶의 배경도 꼽을 수 있다. 해석의 층위가 한 겹인 작품이라 함은, 작품의 외관과 그 의미가 동일한 경우를 말한다. 광화문 광장에 세워진 이순신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은 그 외관과 의미가 동일하다. 해석의 여지가 달리 없다. 그렇지만 보편적인 다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어떤 논란도 만들지 않는, 해석의 층위가 한 겹인 작품은, 역설적으로 예술의 본질을 거스르는 작품이기도 하다. 파리의 에펠탑도 설립 초기에 시민들로부터 흉물 논란과 철거 논란에 시달렸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에펠탑은 파리의 랜드 마크가 됐다.

나는 스스로 미술 대중화에 관심이 많은 평론가라고 자부한다. 미술 전문지보다 일간지나 주간지에 훨씬 많은 글을 발표해왔고, 방송 같은 매스미디어를 친숙한 활동무대로 사용해 왔다. 뉴스 사회란에 보도되는 미술 스캔들과 마주할 때마다, 즉 동시대 미술의 진짜 민낯에 익숙하지 않아서 생기는 대중적 공분과 선정적인 언론보도를 접할 때마다, 미술 대중화의 올바른 길라잡이가 필요하다고 절감한다. 미술 대중화를 둘러싼 가장 일반적인 오해는 ‘미술 대중화는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는 것’이라는 대전제라고 나는 믿는다. 일반 대중과 동시대 미술 사이의 진도 차이는 이미 굉장히 크게 벌어진 상태다. 그 점을 인정하자. 대중의 눈높이나 대중의 취향에, 진도가 한참 나간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맞출 순 없는 노릇이다. 미술 대중화의 출발선은 ‘지금 여기’에 있는 동시대 미술의 실체를 알기 쉬운 방법으로 대중에게 설명하는 작업이어야 한다.

최근 나는 어떤 미술 작품을 변호할 목적으로 법정에 서기로 약속했다. 자세한 공판 내용을 밝힐 순 없으니, 잡지, 빈 병, 마른 풀, 사기그릇 따위를 요령껏 모아놓은 어떤 설치물이 어째서 일상 오브제가 아닌 미술 작품으로 범주화되는 지를 증언하는 자리인 점만 밝히련다. 전문가의 자격으로 동시대 미술의 실체를 이해시키고 설득할 대상에 일반 시민, 언론사에 이어, 이젠 사법부까지 등장한 셈이다.

미술 대중화에 관심이 많은 내가 대중 강연 말미에 항상 덧붙이는 말이 있는데, 이번 칼럼의 마무리로 그 말을 소환하련다. 동시대인으로서 이해 부득인 동시대 미술에 일말의 호감을 품기 위한 대전제는, 표현물에 대한 인내심과 관대함임을 강조하고 싶다. 불특정 다수의 취향과 심기를 충족시킬 수 있는 예술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동시대 미술 혹은 예술의 역할 가운데 하나를 꼽자면, 일상에서 용인될 수 없는 욕구를 ‘표현물의 형식’으로 대리 배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 사회는 이런 해방구에 너무 인색하고 불관용적이다. 문화 선진국의 1차 조건은 하드웨어의 물량 공세가 아니라, 인내심과 관대함이라는 소프트웨어의 가동이다.

반이정 미술평론가(원래 꿈은 배우).
중앙 일간지와 잡지 등에 미술 칼럼과 시사 칼럼 연재. 국내 최초의 아트 서바이벌 방송 ‘아트 스타 코리아’에서 멘토와 심사위원을 지냈다. 『한국 동시대 미술 1998-2009』『예술판독기』 등 여러 책을 썼다. 온라인 거점은 dogstylist.com

‘현대 미술’이냐 ‘동시대 미술’이냐

미술 전공자와 일반인 사이의 진도 차이는 미술을 지칭하는 용어에서 출발하기도 한다. 시중에 현 시대의 미술을 지칭하는 용어로는 현대 미술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렇지만 전공자들 사이에선 동시대 미술이 익숙하다. 현대 미술(modern art)은 인상주의 미술이 등장한 1860년대부터 팝아트와 개념미술이 출현한 1970년대까지로 보는 반면,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은 ‘지금 여기’에 있는 미술을 지칭한다. 이 두 용어는 혼용되어 쓰이지만 우리가 지금 미술관에서 만나는 오늘날의 작품들은 엄밀히 말해서 동시대 미술이다. 나는 올해 초 우리나라의 2000년대 미술의 흐름을 분석하는 신간을 냈는데, 출판사에선 이미 세간에서 익숙한 용어인 ‘현대 미술’을 제목에 넣으려고 했지만, 나는 ‘동시대 미술’을 고집했다. 당장 친숙하지 않더라도 ‘지금 여기’에 있는 미술 현상을 정확히 지칭하는 용어를 의식적으로 써야겠다는 다짐 때문이었다. 동시대 미술에 대한 이해를 지체시키는 요인은 용어 외에도 많다. 서점 미술책 코너는 반 고흐, 피카소, 앤디 워홀처럼 이미 신화화된 미술가들로 천재 타령을 반복한다. 전시장을 거의 찾지 않는 일반인이 드물게 방문하는 전시 역시 인상주의, 반 고흐, 피카소의 대표작 몇 점을 앞세운 블록버스터 전시가 거의 전부이다시피 하다. 전근대기 미술을 선호하는 경향을 탓할 순 없다. 그럼에도 동시대인이라면 ‘지금 여기’에 있는 미술을 칭하는 정확한 용어에 친숙할 필요는 있다. 동시대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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