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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신화의 베개에서 코를 고는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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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

어느 나라에나 신화(mythos)가 있다. 신화는 집단의 기억을 형성해주며 집단을 공동의 담론으로 결속시킨다. 신화는 사회적 삶에 대한 상징적 해석의 틀을 제공해주며 집단을 지배하는 가치체계로 작용한다.

권위적 이름만으로 존중받던 시대는 끝났다 #관행의 신화에서 벗어나 로고스를 지향해야

그러므로 신화는 단지 신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또한 신화에는 이데올로기 혹은 오랜 통념이 만들어낸 가짜 혹은 ‘환상’ 담론도 존재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것들과의 격렬한 싸움 속에 있다. 그 환상의 다른 이름은 ‘관행’이다.

관행으로서의 신화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말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가부장의 신화, 여성은 남성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남근 중심주의의 신화, 대통령이면 실정법을 넘어 마구 힘을 행사해도 된다는 권력의 신화, 경제가 살려면 재벌에게 엄청난 특권을 주어야 한다는 개발 논리의 신화, 국가의 생존을 위해서 이런저런 사상은 절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냉전의 신화들이 사회 곳곳에서 지금 ‘총체적’인 도전을 받고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신화의 시대에서 ‘로고스’(logos)의 시대로 전환하고 있다는 중대한 지표이다.

다수의 국민은 이미 가짜 신화를 믿지 않는다. 대부분의 시민은 이성적 동의 없이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말을 무조건 따를 이유가 없으며, 남성이라는 이유로 여성을 대상화해서도 안 될 뿐더러, 대통령이라고 해서 실정법을 넘어 권력을 행사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재벌의 성장이 특정 소수가 아닌 국민 ‘다수의 경제’에 실질적으로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며, 낡아빠진 색깔론에도 잘 현혹되지 않는다. 이제 아버지의 이름으로, 선생의 이름으로, 회장 혹은 대통령의 이름만으로 존중받던 시대는 끝났다. 이런 변화에 깨끗하게 승복하는 것이 로고스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이다.

그런데 아직도 전근대적인 관행을 진실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마치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에 나오는 죄수들이 그림자를 실체로 착각하는 것처럼, 낡은 신화의 감옥에 갇혀 헛것인 ‘관행’을 진리로 착각한다. 그래서 이들은 국가의 법에 따라 명백한 피의자를 조사하는 것을 ‘표적 수사’라 부르며, 분배와 복지를 강조하면 ‘종북’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들은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는, 살기등등한 현수막을 들고 도심을 행진한다. 사실 그들은 로고스를 비판한다기보다 자신들의 ‘신화’가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신화의 감옥 안에서는 신화의 모순이 보이지 않는다. 그림자가 실체가 아니라는 것은 오로지 동굴 밖을 나올 때만 보인다. 상상하기도 힘든 어마어마한 범죄 피의자로 구속된 전직 대통령을 무죄라고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초법적인 권력과 폭력을 휘둘렀던 신화시대의 ‘아버지의 규칙’을 잊지 못하는 가련한 희생양들이다. 그들의 분노는 가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화를 초시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로 믿고 있으며, 이미 로고스로 넘어간 사회가 자신들의 존엄한 진리를 훼손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논리보다 관행이 우선인 신화는 앞으로도 지속적인 도전을 받을 것이다. 최근 오래전의 성추행 혐의로 문제가 된 사람들은 억울해하며 속으로 중얼거릴 것이다. ‘아니, 왜들 난리지. 원래 다들 그러고 사는 것 아닌가.’ 감옥에 있는 전직 대통령의 무죄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동일한 신화의 맥락에 빠져 있다. ‘아니, 대통령에게 그만한 권력도 없단 말이야. 다들 그러고 지냈잖아.’

애석하게도 ‘다들 그렇게 지내던’ 시대는 끝났다. ‘그렇게 지내도 괜찮다’는 통념은 전근대적인 시대에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과 ‘억압적 국가장치들’(루이 알튀세)이 만들어낸 신화에 불과하다. 구시대의 배가 이미 떠난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낡은 신화의 베개에서 코를 골고 있는 사람들이 요즘 계속해서 망신을 당하고 있다. 망신당하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서둘러 꿈들 깨시라. 신화의 시대는 갔다.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영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