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빈곤 시름 깊어가는데 선심성 좌파 구호만 요란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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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순회특파원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 지지자들이 '콘 차베스(Con Chavez:차베스와 함께)'라고 적힌 붉은 셔츠를 입고 수도 카라카스의 미국대사관 앞에서 반미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고 있다. [카라카스 로이터=뉴시스]

12일 정오(현지시간).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시내 로스 프로세레스 거리. 오전 8시 시작된 '국기의 날' 기념식이 4시간째 계속되고 있다. 국기를 손에 든 군중 사이로 붉은 셔츠를 입은 젊은이들이 "차베스, 차베스"를 연호한다. 셔츠마다 '콘 차베스(Con Chavez:차베스와 함께)'란 글씨가 선명하다. 일당을 받고 동원된 사람들이다.

단상에 선 우고 차베스(51) 대통령은 21세기 사회주의 혁명 이념과 베네수엘라 독립 영웅인 시몬 볼리바르 장군의 이상을 담아 새로 제정했다는 국기를 직접 게양했다. 차베스는 붉은 셔츠를 입은 이들 베네수엘라판 '홍위병'을 앞세워 12월 대선에서 1000만 득표를 노리고 있다. 이 나라 유권자는 1400만 명이다.

차베스의 좌파 혁명이 표류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 편에 서서 체제를 변혁한다는 원래의 이상에 국가주의.애국주의.대중주의가 뒤섞이면서 정체불명의 기형적 이데올로기가 '21세기 사회주의'란 이름으로 허공을 떠돌고 있다. 차베스는 2005년 1월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WSF)에서 21세기 사회주의란 말을 처음 사용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을 통해 미국이 강요한 신자유주의가 중남미 사회를 병들게 하는 양극화 현상의 주범"이라면서 그 처방으로 내놓은 것이다. 하지만 그 실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친(親)차베스 기관지를 자임하고 2년 전 창간된 일간지 '디아리오 베아'의 편집인인 기예르모 가르시아는 "볼리바르 장군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사회주의를 우리 실정에 맞게 변형한 것으로, 소련과 동유럽의 실패한 모델과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군인 출신으로 차베스의 혁명 동지인 윌리엄 이사라 전 외무차관은 21세기 사회주의의 전도사로 알려져 있다. 그는 "형제애와 직접민주주의를 토대로 생산의 결과가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는 공동체 사회의 구현이 목표"라면서도 고전적 사회주의와의 차이점에 대해선 명쾌한 답을 주지 못했다. 베네수엘라 최대 일간지인 '울티마스 노티시아스'의 엘리사르 디아스 편집인은 "이론체계를 만들어 가는 중이라 누구도 확실한 설명을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지적했다.

이스마엘 페레스 베네수엘라 산업연합회 상근부회장은 "21세기 사회주의는 기득권 세력에 대한 빈곤층의 적대감을 이용해 집권한 차베스가 정권 연장을 위해 동원한 '상징 조작'에 불과하다"며 "지금 차베스가 하고 있는 방식으로는 빈곤과 부패 문제가 결코 해결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차베스는 헌법을 새로 제정해 토지와 주택의 공개념을 도입했다. 부재지주의 유휴농지를 사실상 몰수해 땅이 없는 사람들에게 나눠줬고, 소유주의 동의 없이도 비어 있는 아파트에 오갈 데 없는 '홈리스'들이 들어가 살 수 있도록 했다. 또 차등가격제와 제한입찰제를 통해 기업 소유와 경영에 종업원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또 정부 재정의 80%를 차지하는 석유 수입 중 일부를 풀어 빈곤층에 교육.의료 서비스 및 각종 보조금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당장 혜택을 보는 빈곤층은 차베스의 정책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기업 투자는 극도로 위축되고 있다. 정부의 규제와 간섭이 강화되고, 사유재산권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신규 투자에 나설 기업은 많지 않다. 1998년 1만2000개였던 산업연합회 회원 기업 수가 지난해에는 절반인 6000개로 줄었다.

2004년 베네수엘라의 석유 판매 수입은 316억 달러에 달했다. 정부 발표가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수입과 지출의 투명성을 감시하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12월 대선 출마를 선언한 훌리오 보르헤스 당수가 소속된 제1정의당의 에드가르드 쿠티에레스 대변인은 "석유는 베네수엘라에 축복이자 저주"라고 말한다. 석유 수입의 관리와 배분을 집권 엘리트가 독점하는 구조에서는 온갖 부정과 부패가 싹틀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정부만 쳐다보는 국민의 의존적 자세 때문에 근본적인 빈곤 탈출이 어렵게 돼 있다는 것이다. 차베스 정권의 권력 독점과 선심성 정책으로 인해 부패와 빈곤이 오히려 심화하고 있다고 그는 진단한다.

석유가 떠받치고 있는 반미(反美) 대결노선도 차베스 정권의 앞날을 불안케 하는 요인이다. 차베스는 사회주의 형제국인 쿠바에 매년 60억 달러어치의 석유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중남미와 카리브해 일부 국가에도 헐값에 석유를 공급한다. 반미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무기로 석유를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167석의 베네수엘라 국회에는 현재 야당 의원이 없다. 지난해 12월 총선에서 야권은 일제히 선거 참여를 거부했다. 100% 친(親)정부 인사들로 구성된 국회는 차베스의 '고무도장'으로 전락했다. 제도적으로 견제할 세력이 없어진 것이다. 쿠티에레스 대변인은 "차베스 개인과 관련한 민감한 문제는 언론도 제대로 보도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제동장치가 사라진 차베스 좌파 혁명의 현주소다.

쿠바혁명을 피해 베네수엘라로 망명을 온 개인택시기사 넬손 브리토(67)는 "지금 베네수엘라의 상황이 사고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았던 50년 전 쿠바를 닮아가고 있다"며 "역사의 시계 바늘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배명복 순회특파원

◆ 우고 차베스=1998년 대통령에 처음 당선됐으며 2000년에 재선됐다. 서구 자본주의에 반대하며 지주나 부동산 보유자에게 빼앗은 재산을 빈민에게 나눠주는, 전형적인 '좌파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 정책을 펼쳐왔다. 2002년 4월에는 군부 쿠데타로 실각했다가 대규모 지지 시위를 등에 업고 이틀 만에 복귀하기도 했다. 석유를 앞세워 반미 정책을 펴면서 남미 좌파 지도자들의 맹주로 떠오르고 있다. 쿠바의 공산 지도자에 빗대어 '제2의 피델 카스트로'로 불린다.

*** 바로잡습니다

3월 20일자 3면 '베네수엘라 포퓰리즘 정치 현장'기사에 모호한 표현이 있었습니다. "2004년 베네수엘라의 석유 수입은 316억 달러에 달했다"는 대목인데, 여기서'석유 수입'을 '석유 판매 수입'으로 고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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