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주부의 "야구 대~한민국" 14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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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란씨가 19일 시청 앞 광장에서 세 아이와 함께 한국팀을 응원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막내 양건영(4)군, 둘째 아현(6)양, 첫째 희연(8)양. 김성룡 기자

"지난 14일은 흥분과 감동의 연속이었지요. 아이들에겐 대한민국에 대한 자긍심과 꿈을 심어줄 수 있었던 기회였어요."

19일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준결승전 응원을 위해 서울시청 앞 광장을 찾은 주부 윤경란(41.서울 구로동)씨. 마지막 순간까지 숨죽이며 경기를 지켜본 그는 한국의 결승 진출이 좌절되자 아쉬움에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이날 윤씨는 남편과 함께 여덟 살.여섯 살 된 두 딸,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거리응원에 나섰다. 어려서 야구가 뭔지도 잘 모르는 아이들이지만 '미국.일본을 꺾은 자랑스러운 한국'의 경기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윤씨는 아이들에게 'KOREA'가 새겨진 파란 티셔츠를 입히고 손수 얼굴에 태극기도 그려줬다.

그는 경기 시작 한 시간 전부터 2만여 명의 시민 속에 자리를 잡고 아이 셋과 함께 막대풍선을 두드리며 "대~한민국"을 외쳤다. 하지만 7회 초 일본이 2점 홈런을 치면서부턴 "어떡해"를 연발하며 안타까워했다. 8회 초 비로 경기가 잠시 중단되자 패배를 예상한 듯 응원하던 시민 중 3분의 2가량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하지만 윤씨는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한국팀에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윤씨에게 WBC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전까지 "너무 길어서" 한번도 9회 말까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야구에 무관심했다. 좋아하는 스포츠는 2002년 월드컵 때 즐겨본 축구뿐이었다.

하지만 5일 TV를 통해 도쿄돔에서 이승엽 선수가 역전 2점짜리 홈런을 날렸던 일본전을 보고 순식간에 야구에 빠져버렸다.

"야구가 정말 짜릿한 스포츠라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상대가 일본이라는 점은 더욱 매력적이었지요."

이후 2라운드 경기는 한번도 빼놓지 않고 응원했다. 처음엔 경기규칙을 잘 몰라 홈런.안타만 간신히 구분할 정도였지만 남편에게 하나하나 물어보면서 조금씩 배워갔다.

2라운드 멕시코 경기에서 이승엽이 또 홈런을 치는 걸 보고는 '이승엽의 열혈팬'을 자처하게 됐다. 미국전에서 최희섭이 시원한 3점포를 날리던 순간은 윤씨가 꼽은 "WBC 최고의 순간"이다. 일본을 꺾고 4강 진출이 확정될 때도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덩치 큰 서양인들에 맞서 온몸을 던져 승리하는 선수들의 투혼을 볼 때면 벅찬 감동으로 눈물을 글썽였다고 한다.

남편 양병은(45.연주가)씨는 "야구를 잘 모르면서도 정말 열심히 응원하더라"며 "야구가 가족 사랑을 다지게 했다"고 말했다. 이날 거리응원도 윤씨가 먼저 가자고 졸랐다고 한다.

윤씨는 "어렵다는 경제 얘기도, 복잡한 정치 얘기도 한동안 잊고 모든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해준 기쁘기만 한 시간이었다"며 "비록 결승에 오르지 못했지만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고, 아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칠 수 있어 뿌듯하다"고 말했다.

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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