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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금주령에 얽힌 연극 '주공행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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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나라에서 술을 마시지 못하게 막는다면? 그 많던 '취중 행패'와 '필름 끊김'의 찜찜함은 없어질 터. 숨바꼭질 같은 '음주 단속'도, 툭 하면 터져 나오던 폭탄주와 성희롱의 악연도 확실히 끊기지 않을까. 물론 주류 업체와 숙취 해소제 제약회사야 사활을 걸고 막겠지만 말이다.

'주공행장(酒公行狀)'은 바로 '금주령'에 대한 연극이다. 20세기초 밀주와 갱단을 득실거리게 만든 '금주법'은 미국만의 역사가 아니었다. 조선 시대에도 각종 실록을 들춰 보면 흉년이 들거나 역질이 돌면 시한을 두어 금주령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연극 '주공행장'은 역사적 사실에 정치적 권력 다툼과 인간의 근원적 고독을 적절히 버물려 썩 맛깔스런 식탁을 차렸다. 한국 마당극을 이끌어온 극단 미추의 창단 20주년 기념작이자, '미스테리 사극 코미디'를 표방하고 나섰다.

#임금에게 술을 먹여라!

연극은 마치 변사극같다. 늙은 주호(주인공)가 옛날을 회상하는 사이 필름이 돌아가는 것처럼 무대 위엔 이야기가 펼쳐진다. '행장'이란 한자는 '죽은 사람의 일대기를 기록한 글'이란 뜻. 결국 '주공행장'을 풀어 쓰면 "마시지 못하게 해 결국 죽은 것이나 다름 없는 '술 선생'에 대한 애도사" 정도가 아닐까.

극은 임금과 어린 소년 주호란 두 인물을 대비시키며 진행된다. 왕좌에 올랐으나 천한 무수리 소생이어서 대신들로부터 조롱을 당한 임금은 금주령을 활용해 강력한 왕권을 세우려 한다. 그러나 금주령은 힘 없는 서민들만 울렸다. 그 중 한 명이 금주령의 폐단을 상소하려다 관아에 끌려가 죽음을 맞은 주호의 아버지. 열살 밖에 안 된 주호는 아버지의 장례식날, 얼떨결에 술을 마시고 취태를 부리다 유배길에 오른다.

산전 수전을 겪은 끝에 성인이 된 주호. 그는 임금에게 미움보단 인간적 측은함을 느낀다. 한번쯤 술에 취해 복잡한 일상에서 해방되길 기원한다. 그러나 엄한 금주령을 내린 왕이 술을 마셔 자기 발등을 찍을 순 없을 터. 이에 주호는 목숨을 건 채 권주시를 지어 임금의 마음을 돌리려 하나, 그 긴장된 순간 갑자기 웃음보가 터져 나온다. 죽음 혹은 숙명같은 엄숙함도 결국 웃게 만들 수 있는 게 술이라는 얘기일까?

#어라, 요즘 정치판과 똑같네

연극엔 사대부들의 끊임없는 도전을 온 몸으로 막는, 윤현이란 인물이 나온다. 임금의 충복인 그는 술에 취해 민간의 아녀자를 범하는 스캔들을 일으키고 만다. 당연히 대신들의 항소가 들끓을 터. 임금은 윤현을 불러들인다.

임금 "네가 없었다면 어찌 오늘의 내가 있었겠느냐."

윤현 "망극하옵니다."

임금 "내가 아직 대군의 몸이었을 때, 살엄음판 건너듯 하루하루 보내던 시절을 기억하느냐?"

윤현 "어찌 잊사오리까."

임금 "그 전쟁터를 너는 나와 함께 뚫고 왔다. 그리고 그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 같구나."

그리곤 임금은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윤현을 엄벌에 처한다. 최근 불거진 정치판의 성희롱.골프 파문이 절묘히 한꺼번에 오버랩되는 장면이다. 손진책 연출가는 "일부러 염두에 둔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론 정치적 재해석이 가능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권주시로 이태백의 시(장진주.將進酒)를 그대로 써먹은 장면은 현대에 만연된 표절 문화를 풍자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과거에 갇혀 있기 보다 현재를 꼬집고 싶은 최근 사극의 트렌드가 여기에도 충만해 있다. 26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르코 예술극장에서. 02-747-5161.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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