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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박씨가 이 박씨였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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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9호 34면

나른한 무기력. 이게 내 인생을 설명하는 키워드였지. 좋아하는 일로 직업을 삼아야 한다는데, 내게 그런 게 있을 턱이 있나. 이에 비해 근면·성실·발랄한 마누라에게는 딱 한 가지 문제가 있었어. 남자 보는 눈이 없다는 거. 아무리 남편 얼굴 들여다봐도 미래가 안 보이니 직접 사업을 시작했지. 그게 어린이집이야. 마누라 전공이기도 하고 나도 애들하고 노는 건 좋아하니까.

서현의 상상력 사전: 흥부전

매물광고 보고 대출받아 어린이집 인수했어. 그래서 마누라는 원장, 나는 원장 남편이자 이사장. 이사장이 할 일은 노란버스 운전. 아직 우리가 애도 안 낳았을 때인데 주변에 항상 애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풍경이었지.

그런데 자연 속의 어린이집이 왜 급매로 나왔는지 금방 알겠더라고. 자연 속은 맞는데 경사가 급해서 노란 버스가 건물 앞까지 못 가. 주차장에서 계단 오르고 한참 걸어야 현관이니 눈비 오면 문제가 심각해. 애들이 넘어지고 자빠지는데 엄마들이 좋아할 리가 없지. 듣기만 하던 운영난이 바로 이거더라고.

궁리 끝에 카페를 지어보자는 생각이 들었지. 요즘 교외에 가면 말도 안 되는 위치인데 특이한 카페라고 찾아가는 사람들 많잖아. 어린이집 부속시설로 허가 내고 커피 팔면 현상유지는 되겠다고 본 거지. 그래서 초가집 모양으로 적당히 설계하고 공사를 시작했어.

그런데 워낙 싸게 짓는 건물이니 공사업자도 성의가 없어. 당연히 현장소장도 없고 알바생 비슷한 친구가 현장관리를 하는 거야. 공병으로 막 제대한 친구였는데 복학하기 전에 현장 체험 중이래. 군대 가기 전에는 나이트클럽 웨이터도 했대. 웨이터들은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잖아. 강호동, 뻐꾸기, 도깨비 하는 식으로. 이 친구 이름은 제비였어. 원래 이름은 재희야, 박재희. 본명하고 제일 비슷한 이름을 지은 거지.

저녁에 작업 끝나면 제비하고 소주도 한 잔씩 했어. 어린이집은 애들 빼면 여자들만 우글거리는 데야. 그러니 지금 보면 제비와는 건물 지은 게 아니고 소주 마신 기억만 남아 있어. 제비가 나보다 열 살 아래였는데 인생 경험은 열 배 화려해. 인생의 희로애락이 다 나이트클럽에 모여 있더라고.

지붕 공사하는 날이었어. 처마 끝에 가설구조물 덧대는 일이었는데 제비가 그걸 직접 하겠다고 나섰다가 떨어진 거지. 사람이 바로 눈앞에서 툭 떨어지는데 환장하겠더라고. 나는 제비가 죽은 줄 알았어. 내가 할 줄 아는 건 만화에서 본 것밖에 없지. 뺨 때려보고 물 갖다 끼얹고.

한참 있다 제비가 정신 차렸는데 내가 제 목숨 구한 걸로 오해하는 거야. 자기 심장이 멎었는데 내가 심폐소생술 하느라고 땀으로 온몸이 다 젖은 줄 알더라고. 정신이 없으니 오해할 수도 있었겠지. 그래서 졸지에 내가 제비 목숨 구해준 흥부가 된 거지. 다리 부러진 제비는 결국 두 달 목발 짚고 다녔어.

그런데 알고 보니 제비 아버지가 그룹사 회장인 거야, 강남역 근처에 사옥이 있는. 제비가 가서 아버지에게 생명의 은인 이야기를 한 거지. 이 그룹 건설회사에서 신도시 아파트 건설하고 있었어. 회장이 손을 써서 거기 어린이집 자리 분양받게 해준 거야. 물론 아무 주저 없이 원래 있던 어린이집 팔고 또 대출받아 옮겼지. 그게 지금 여기인데 큼지막한 박이 터졌지, 대박이. 엄마들이 우리 어린이집에 애들 보내겠다고 아우성이라 대기번호가 항상 밀려.

흥부전에서는 박씨 덕분에 부자가 된다고 하지? 박씨 덕분인 건 맞아. 제비가 김씨 아니고 박씨라니까. 그런데 생각해 봐. 하루아침에 부자가 되는 방법은 로또밖에는 없어. 그렇게 로또 당첨된 사람들이 결국 모조리 불행하더라는 소리 들었지? 나는 로또 당첨된 거보다 훨씬 더 부자고 행복해. 그 뒤로 우리가 낳은 애만 넷이야. 투 볼 투 스트라익. 게다가 어린이집에 가면 꼬맹이들이 매일 삐약삐약 거리는데 그거 보고 있으면 시간이 오는지 가는지 몰라.

우리 어린이집 노란버스는 여전히 내가 운전해. 앞으로도 죽 그럴 거고. 아침에 애들 태우려고 운전대 앞에 딱 앉으면 항상 흥분돼. 이유는 내가 흥부기 때문이지. 그럼, 내가 흥분데. ●

서현 : 한양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본업인 건축 외에 글도 가끔 쓴다. 건축에 관한 글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뒤집는 건축적 글쓰기방식에 더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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