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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해야 안전해진다]고속 성장하며 비상구는 안 만든 대한민국의 '불안 성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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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수십년째 급성장한 밀양 세종병원 

그래픽=박경민·심정보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심정보 기자 minn@joongang.co.kr

'가족들이 사는 집 한채와 병원으로 쓰는 건물 한 동'. 밀양 토박이 우모(61)씨는 1980년을 전후한 밀양 세종병원의 모습을 그렇게 기억했다. 지난달 31일 만난 우씨는 불에 그을린 흔적이 남은 세종병원을 가리키며 "당시엔 건평이 20평 남짓했고 이름도 ‘경남의원’이었다”고 말했다. 병원 인근에서 43년째 통닭집을 운영 중인 A씨도 "원래 작은 의원이 증축을 거듭하며 지금처럼 커졌다"며 "병원 주인도 몇 차례 바뀌었다"고 말했다.

세종병원의 성장 이력은 건축물 대장에 적혀 있다. 첫 증축 기록은 1992년 6월. 1층을 227.01㎡ 규모로 증축한 뒤 그해 11월 2층(259.82㎡)과 3층(203.60㎡)도 지었다. 이듬해 4층(87.36㎡)을 올리며 확장을 거듭했다. 1997년 외환위기 때는 부침도 겪었다. 3층은 1998년 8월부터는 독서실로 쓰이다 5년뒤 다시 의원 건물로 복귀했다.

2005년엔 '의원'이 '병원'으로 업그레이드됐다. 소규모였던 4층을 허물고 3배 이상 크게 증축(275.69㎡)했다. 5층(209.82㎡)도 새로 올려 건물 전체가 병원 건물이 됐다. 2006년에는 모텔로 쓰던 ‘나동’ 건물도 인수, 의료시설로 용도를 바꿨다. ‘세종요양병원’의 시작이었다.

안전 확보 안된 ‘불안한 성장’, 대한민국과 닮은 꼴

밀양세종병원(왼쪽)과 요양병원(오른쪽)을 다리처럼 연결한 통로(정면 세종병원 간판 쪽) 위에 설치한 불법건축물인 비 가림막이 보인다. 이 가림막은 화재 때 연기를 배출하지 못하고 통로 역할을 했다고 경찰은 밝혔다. 송봉근 기자

밀양세종병원(왼쪽)과 요양병원(오른쪽)을 다리처럼 연결한 통로(정면 세종병원 간판 쪽) 위에 설치한 불법건축물인 비 가림막이 보인다. 이 가림막은 화재 때 연기를 배출하지 못하고 통로 역할을 했다고 경찰은 밝혔다. 송봉근 기자

이처럼 외형의 성장이 거듭됐음에도 안전시설이 제자리 걸음을 걸으면서 비극의 씨앗도 싹텄다. 경찰 등에 따르면 세종병원이 지난 2005년 증축하며 밀양시에 제출한 도면에는 1층 계단에 방화문 2개가 설치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경찰이 확보한 2008년 도면에는 이 방화문이 없었다고 한다. 결국 1층 화재현장에서 발생한 유독가스는 방화문이 없는 중앙계단을 타고 2층으로 번져 의사와 환자 등 39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밀양소방서 관계자는 “방화문이 있었다면 연기 유입을 지연해 환자가 대피할 시간이 늘어났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전문가들은 "세종병원이 커온 모습은 외형만 키우면서 안전 관리에 소홀했던 대한민국 ‘불안한 성장’의 상징적 단면"이라고 지적한다. 백동현 가천대 설비소방공학과 교수는 "안전 문제는 인풋을 넣어도 아웃풋이 없다"며 "먹고살기 힘든 시절에는 그냥 넘어갔지만 평균 소득 3만달러 시대에 맞게 안전에 대한 인식과 체질, 문화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유사한 인명 사고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불안성장 징후…대한민국 곳곳에

참사가 일어난 충북 제천의 스포츠센터 건물 외벽은 손으로 세게 누르면 부서지는 스티로폼 단열재로 만들어져 있다. 불에 잘 타는 스티로폼 단열재는 화재가 번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송우영 기자

참사가 일어난 충북 제천의 스포츠센터 건물 외벽은 손으로 세게 누르면 부서지는 스티로폼 단열재로 만들어져 있다. 불에 잘 타는 스티로폼 단열재는 화재가 번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송우영 기자

불안 성장의 징후는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참사에서도 드러났다. 제천 센터는 7층으로 지어져 2012년과 2013년 2차례 증축했다. 하지만 규모를 키우면서도 비상구를 막아 놓는 등 안전 관리는 제대로 하지 않아 1층에서 일어난 화재가 대형참사로 비화했다. 제천화재 유가족 박병준씨는 “이제 와서 소방법·건축법 급히 고치는 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 아니냐. 누가 이런 나라에 살고 싶다는 생각 들겠느냐”고 지적했다.

31일 찾은 서울 명동의 한 빌딩. 소화전이 크리스마스 장식과 사다리로 가로막혀 있다. 이 건물 2층에는 스프링클러도 설치돼있지 않다. 이태윤 기자

31일 찾은 서울 명동의 한 빌딩. 소화전이 크리스마스 장식과 사다리로 가로막혀 있다. 이 건물 2층에는 스프링클러도 설치돼있지 않다. 이태윤 기자

이런 건물들은 평온해 보이는 일상 곳곳에 산재해 있다. 지난달 30일 찾은 서울 을지로 4가의 한 2층짜리 조명상가는 건축 허가를 받은 적이 없는 건물이다. 수백개 이상의 조명이 설치돼 화재 위험이 크지만 소방점검은 받은 적이 없다. 인근 을지로2가 식당과 카페 등이 입점한 10층 규모 대형 종합상가 2층에는 스프링클러조차 없었다. 이 건물은 지난해에만 위법사항이 20건 적발돼 이행강제금 6600만원을 부과받았다. 건물 내부 소화전은 크리스마스 트리로 가려둔 상태였다.

건물 내 카페직원은 “들어온 지는 1년 정도 됐는데 그 전부터 이미 불법 증축한 상태였다. 1년에 두번인가 벌금(이행강제금)을 내면서 버티고 있는 걸로 안다”고 전했다. 조성일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초빙교수는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가 붕괴된 게 벌써 수십년 전 일이다. 다중이용시설 등을 중심으로 안전 업그레이드에 매년 얼마의 비용을 얼마나 썼는지 점검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한영익·송우영·이태윤·위성욱·임명수·김정석·홍지유· 권유진ㆍ정용환ㆍ김정연ㆍ정진호 기자 hany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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