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는 의리 아닌 논리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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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국내에선 현재 총선 열기가 뜨거우나 「수입개방압력」으로 대변되는 한미간 통상마찰 해결은총선 못지 않게 중요한 당면국가대사다.
미국대통령예비선거전의 「게파트」선풍에서 드러났듯 수입개방의 파고는 우리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정부의 대미통상외교 접근자세는 아직도 구습의 탈을 벗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안타까운 마음에 충고의 말을 보내고 싶다.
미국인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합리성」이다.
합리성이란 소위 인간적인 유대보다는 실리의 계산에 바탕을 둔 논리를 중시하는 행동양식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인의 행동양식 특징은 「의리성」이 두드러지게 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의리 성이란 실리보다는 인간간의 유대에 바탕을 둔 끈적끈적한 감성을 중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합리성과 의리성의 차이는 양국 생활습관의 구석구석에서 나타난다.
함께 간 그룹의 점심 값을 한사람이 다 내는 것은 의리성의 입장에서 볼 때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합리성의 입장에서는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 같은 입사동기가 능력의 차이에 관계없이 똑같은 월급을 받는 것이 의리성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나 합리성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매우 이상할 수도 있다. 미국에서는 한 회사의 입사동기간의 월급이 능력에 따라 다다른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나라 대미통상외교 자세를 짚어볼 때 우리는 지금까지 합리성이 바탕이 되고 있는 미국이란 나라에 의리성의 원리를 적용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피로 맺어진 맹방」이란 개념은 의리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의미가 큰 것이겠지만 합리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더욱이 뚜렷한 실리에 부딪쳐서는 그 의미가 얼마든지 퇴색돼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실리적 계산에 따라 손해가 될 때는 과거를 생각지 않고 태도를 바꿔 냉정하게 몰아붙일 수 있는 것이「합리적」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때때로 미국에서 쓰는 생떼. 억지 같은 것이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미국인의 눈에 우습게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억지·생떼라는 것은 모두 기본적인 유대, 즉 의리를 바탕으로 할 때 가능한 것이지 냉정한 합리성의 관점에서 볼 때는 구질구질하게 보이고 때로는 가소롭게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작년에 쇠고기수입을 부분적으로 개방하겠다고 약속해놓고는 그 약속을 어기고 부총리를 연초부터 워싱턴에 보내 억지를 쓰는 것 등도 모두 의리성의 논리에 입각한 행태가 아닐까?
로비활동의 형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인간관계를 돈으로 사려고 한 박동명의 로비활동이나 거물급 인사와 끈적끈적한 친분을 가진 「디버」를 고용한 것도 다 의리성의 관점으로 로비활동을 본데서 출발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합리성이 의리 성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태평양 연안 국가들의 부상은 도리어 의리성의 우월성을 웅변적으로 시사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상대하는 나라가 합리성을 추구하는 나라이고 우리가 그들을 설득시켜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우리의 접근법도 합리성에 바탕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합리성에 입각한 대미 접근법은 어떤 것일까? 우선 합리적인 우리의 논리를 수립해야 할 것이다. 미국인이 이해하는 합리적인 논리란 결코 우리의 입장만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합리적인 논리란 상대방의 논리를 수용하고 그 장단점을 따지고 동시에 우리논리의 장단점을 따져 우리논리의 우월성을 제시하는 것을 뜻한다.
자주 우리 나라 고관들이 미국에 와서 미국고관을 만나 장황하게 우리의 사정만 설명하고(의리에 호소하고) 가면서 큰 로비나 한 듯이 생각하고 가는 것은 착각이다. 합리적인 미국인은 논리적인 비교 분석 없이는 설득하기 힘들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워싱턴에 그렇게 변호사가 많은 것은 이들 변호사들이 이러한 논리의 수립과 그것을 명쾌하게, 설득력 있게 개진하는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사실에 바탕을 둔 설득력 있는 논리를 수립하고 그 논리의 체계 하에서 상대방을 일관성 있게 설득해야 한다. 논리로 싸워야지 오로지 인간관계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협상결과에 따른 약속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지켜야 한다. 거짓말 한번 했다고 「닉슨」대통령을 몰아낸 미국인에게 한국인이 거짓말하는 사람으로 비쳐질 때의 손해를 생각해 보라.
의리가 통하지 않는 곳에 의리로 호소해보아야 소용이 없다. 혹시 합리를 써야할 곳에 의리를 쓰지 않았나 우리의 자세를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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