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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 수사와 재난이 복사되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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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조강수
조강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조강수 사회데스크

조강수 사회데스크

어느 모임을 가나 단골 화제 중 하나는 이명박 전 대통령 운명의 향배다. 서슬 퍼런 검찰의 쌍칼이 시시각각 옥죄어 오는 지금 바람 앞의 등불, 고양이 앞의 쥐 신세라는 얘기들이 많다. 시기도 미묘하다. 자신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 심혈을 기울여 유치한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을 코앞에 두고 있어서 심경이 더욱 참담할 듯하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집중 타깃이 된 것을 두고 ‘죽은 노무현이 산 이명박을 잡는 형국’이라는 비유도 나온다. 며칠 전 지인들과의 저녁 자리에서도 신구 권력의 정면충돌이 화두에 올랐다. 한 대기업 임원이 “정치는 잘 모르지만 기업에 30년 있어 본 경험”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지난 정권에 보복 수사하는 OECD 국가는 찾기 힘들다 #법치와 시스템만으로 조용히 잘 굴러가야 선진국이다

“한때 미국에서 팔리는 프로스펙스 신발 3개당 1개가 왕자표 고무신으로 유명한 국제그룹이 납품한 거였다. 국제그룹 양정모 회장이 망한 이유는 전두환 대통령에게 찍혀서였다.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은 세리 출신이라서 검찰·경찰·세무서·여당·행정부에 다 잘했다. 그런데 야당한테 못했지. 야당이 권력형 비리를 터트려 망했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은 여야에 두루 잘했지만 내부자의 배신으로 망했다. 살아있는 권력한테는 무조건 잘해야 한다. 죽었다 싶은 권력에도 잘해야 한다. 사흘 만에도 부활하니까. 안에 있는 직원들한테도 잘해야 한다. 결론은 두루 잘해야 살아남는다.”

기업은 정권이 바뀌어도 살아남아야 하기에 그렇다 치자. 권력의 속성은 다르다. 산 권력과 흘러간 권력뿐이다. 신진 권력은 적폐 수사, 과거 청산 등의 명분으로 사정하고 숙청한다. 정권 교체기마다 전직 대통령들이 도돌이표처럼 반복적으로 사법적 단죄를 받는 배경이다. 당하는 입장에선 보복 수사라고 주장한다. 그래도 희망이 있는 건 전두환·노태우, 노무현, 박근혜, 이명박 등으로 수사가 이어지는 동안, 이른바 ‘적폐’의 규모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 아닐까. 권력형 범죄에서 개인 비리·정부 관행으로 변화했다. 이런 식으로 가다 보면 언젠가는 임계점에 도달하고 양질 전화가 일어나 정치 권력계의 풍토가 정화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대형 재난 역시 3D프린터에 돌린 듯 복사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한반도 관측 사상 두 번째 큰 규모였던 진도 5.4의 포항 지진이 덮쳤다.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12월에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29명 사망), 인천 앞바다 낚싯배 전복(15명 사망), 이대목동병원 중환자실 신생아 세균 감염(4명 사망), 크레인이 시내버스를 덮친 사고(1명 사망) 등이 연달아 터졌다. 며칠 전엔 경남 밀양 세종병원 화재 참사로 노인 등 37명이 숨지고 151명이 부상했다. 지진 같은 천재지변을 막는 건 애당초 불가능하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사전 대비와 피해 최소화다. 화재나 낚싯배 침몰 사고 등에선 진압의 골든타임을 놓치거나 방화문 작동이 되지 않거나 해경이 늦게 출동하는 등의 잘못이 더해져 인명 피해가 커졌다. 정말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다. 저러다 어린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숨지는 사고라도 난다면 ‘제2의 세월호’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안전 의식과 기강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방증이다.

우리나라는 1996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정식 가입하면서 경제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다. 하지만 정치와 권력은 여전히 후진국형이다. 현재 35개 회원국 중 정권 교체기마다 보복성 수사가 진행되고 인재성 재난이 반복되는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다. 법치와 시스템만으로도 조용히 잘 굴러가야 선진국이다.

문재인 정부가 통합 대신 적폐 청산에 몰두하는 이유에 대해 일부 정치학자들은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같은 오너 정치인이 아니라 기업의 CEO 같은 위치라서일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선거 때 진 표(票)의 빚과 인(人)의 다층적 장막에 둘러싸여 운신의 폭이 좁다는 의미다. 하지만 내일이라도 상생·통합·협치로 궤도를 바꾼다면 다시 지지율이 70%대로 치솟고 전국에 ‘문꼴오소리’들이 넘쳐나지 않겠는가.

조강수 사회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