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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다이어리에 남긴 ‘죽음의 현장실습’, 바뀐 건 없었다

중앙일보

입력

목포해양대 3학년 장모씨가 해외 현장실습 중 선박에서 숨지기 전, 다이어리처럼 달력에 쓴 메모. 더위에 고통스러워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사진 유족]

목포해양대 3학년 장모씨가 해외 현장실습 중 선박에서 숨지기 전, 다이어리처럼 달력에 쓴 메모. 더위에 고통스러워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사진 유족]

지난해 8월 카타르에 정박 중인 선박에서 취업실습 중 숨진 목포해양대 3학년 장모(23)씨의 사망 원인은 열악한 실습 환경과 과도한 업무라는 사실이 5개월 만에 수사 결과로 드러났다. 장씨는 ‘죽음의 현장 실습’ 실태를 보여주는 메모를 남긴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사건 이후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해경, 지난해 8월 카타르서 숨진 목포해양대생 수사 마무리 #숨진 학생, 더위 속에서 일하며 느낀 고통과 두려움 메모해 #사건 이후 정치권에서 개선 목소리 나왔지만 정부는 '방치'

부산해양경찰서는 23일 장씨를 숨지게 한 혐의(업무상과실치사)로 파나마 국적의 액체 화학제품 운반선 G호(1만9000t급) 선장 이모(61)씨를 기소 의견으로 불구속 송치했다고 밝혔다. 해경은 지난해 8월 7일 카타르 메사이드 항구에 있던 G호에서 실습항해사 장씨가 미얀마 출신 선원과 탱크 청소 중 숨진 뒤 정확한 사망 원인을 가리기 위해 최근까지 수사를 벌여왔다.

목포해양대 3학년 장모씨가 해외 현장실습 중 선박에서 숨지기 전, 다이어리처럼 달력에 쓴 메모. 근로에 투입된 것을 증명하는 내용이다.[사진 유족]

목포해양대 3학년 장모씨가 해외 현장실습 중 선박에서 숨지기 전, 다이어리처럼 달력에 쓴 메모. 근로에 투입된 것을 증명하는 내용이다.[사진 유족]

해경은 숨진 장씨가 선실에서 다이어리처럼 쓴 탁상용 달력에 남긴 일기 형식의 메모를 확인했다. 메모에는 더위에 고통스러워하는 장씨의 당시 상황이 고스란히 담겼다. 국과수가 염두에 둔 사망 원인도 더위다.

메모를 보면 8월 3일에는 ‘매우 덥다(중략), 클리닝 작업 매우 더웠다. 앞으로 2~3일은 더 할텐데 마음 단단히 먹자’라고 적혀 있다. 다음날인 4일에는 ‘정말 매우 덥다, 온도가 40도 가깝고(중략) 덥고 힘이 빠졌다. 그래도 하루는 지났다’는 메모가 이어진다.

목포해양대 3학년 장모씨가 숨지기 전 부모와 주고받은 휴대전화 메신저 대화. [사진 유족]

목포해양대 3학년 장모씨가 숨지기 전 부모와 주고받은 휴대전화 메신저 대화. [사진 유족]

8월 5일에는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는 내용이 있다. 장씨는 이날 ‘너무 덥다, 온몸에 땀띠가 난 거 같다. 물을 정말 많이 먹고 있는데도 부족한 거 같다’고 적었다. 사망하기 하루 전날에는 ‘매우 무척 굉장히 최고로 힘들다’는 절규가 남겨졌다.

이 메모를 토대로 수사를 벌인 해경은 장씨가 정식 선원도 견디기 어려운 환경에서 과도한 근로를 하다가 숨진 것으로 결론을 냈다. 해경에 따르면 지난해 7월 중순 항공편으로 싱가포르에 도착한 뒤 G호에 ‘실습항해사’ 자격으로 합류한 장씨는 정식 선원처럼 일을 했다.  ‘실습’이 아닌 ‘노동’에 투입됐다는 의미다.

목포해양대 전경. [사진 네이버 지도 캡쳐]

목포해양대 전경. [사진 네이버 지도 캡쳐]

해경은 장씨가 하루 12시간씩 근무를 한 것으로 판단했다. 선원법에 따르면 선원의 경우에도 하루 근무시간은 8시간으로 제한돼 있다. 장씨는 하루 6시간 근무 후 6시간은 휴무인 것처럼 근무일정이 짜여져 있었으니 실제로는 제대로 된 휴식이 보장되지 않았으며 쉬는 시간에도 일했다고 한다.

사고 이후 카타르 현지에 정박 중인 선박에서 측정한 기온은 50도 안팎이었다. 장씨는 이 같은 환경에서 화학제품을 싣기 전 탱크를 청소하는 일을 선원과 함께 하다가 숨졌다. 해경 관계자는 “장씨와 함께 일을 했던 또 다른 열대 지방 출신 외국인 선원은 ‘너무 덥고 힘이 들어서 견디기 어렵다’며 하선을 한 사실도 확인됐다”고 말했다.

목포해양대 학생이 실습 중 숨진 카타르 메사이드 항구 위치. [사진 구글지도 캡쳐]

목포해양대 학생이 실습 중 숨진 카타르 메사이드 항구 위치. [사진 구글지도 캡쳐]

장씨가 머무는 선내 공간 환경도 열악했다. 실내온도가 40도 가까이 됐지만 에어컨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선장이 주로 생활하는 조타실과 기관실에만 에어컨이 가동됐다. 일부 선원들의 경우 이들 공간에서 생활했지만 취업을 위한 실습생 입장인 장씨는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장씨와 함께 숨진 미얀마 선원도 냉방 장치가 없는 선실에서 생활해왔던 것으로 조사됐다. 국과수는 사망 원인에 대해 ‘열사병을 배재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해기사 자격을 따기 위해서는 1년의 승선 경력이 필요하다. 해양대 학생들은 통상 6개월은 교내 실습선에서 경력을 쌓고 나머지 6개월은 선사의 실습선을 탑승한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실습보다는 근로에 투입되고도 제대로 된 보상조차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장씨도 정식 급여 없이 품위유지비 명목으로 매달 미화 300달러(약 32만원)를 받기로 한 상태였다. 목포해양대에서만 한 해 500여 명이 실습을 나간다.

장씨의 사망을 계기로 실습제도 개선 목소리가 정치권에서 나왔지만 정부와 학교는 사실상 아무런 후속 대책이 없는 상황이다. 목포해양대 이남일 취업실습팀장은 “(장씨 등 학생들은) 근로가 아닌 실습을 하고 있는 것이어서 처우 등이 열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했다. 해양수산부 선원정책과 황영진 사무관은 “학생이 원치 않으면 선사 실습선을 타지 않아도 된다. 실습선에 탄 뒤 문제가 있으면 학교 등을 통해 의견을 내고 개선을 요구하거나 하선을 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원론적인 얘기라고 반박한다. 익명을 요청한 한 학생은 “졸업 후 선사에 취업을 희망하는 학생들이 어떻게 선사 실습선을 안 탈 수 있겠느냐”며 “매우 좁은 선박 업계 특성상 문제 제기도 쉽지 않다. 학교나 해수부의 입장은 실질적인 대책 마련은 없이 모든 책임을 학생들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언제든지 비극이 반복될 수 있다”고 말했다.

목포=김호 기자 kim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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