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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천사' 한비야의 이라크에서 보낸 편지] 中. '대접' 받고 사는 50만 기독교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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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나만 몰랐던 걸까. 놀랍게도 이라크에는 50만명이 넘는 기독교인이 있단다. 특히 모술은 기독교 신자가 가장 많은 곳이다. 도시 외곽 니느웨 지역은 구약성경에서 요나가 고기 뱃속에 갇혀 곤욕을 치른 후 찾아갔던 바로 그 도읍이다.

여기에서는 이슬람 사원의 기도 시간을 알리는 소리와 교회 종소리를 함께 들을 수 있다. 소수의 기독교 신자들은 박해는커녕 오히려 대접받고 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차림새부터 자유롭다.

여자들은 머리를 가리지 않는데 딱 붙는 청바지와 짧은 소매의 옷을 입고 다녀도 뭐라는 사람이 없다. 후세인 정권 때에도 기독교 신자들의 상권은 철저히 보호됐다고 한다. 신자들은 근무 시간 중인 일요일 오전 미사나 예배를 보러 갈 수 있다.

우리도 일요일에 교회나 성당에 간다. 천년도 넘은 건물이 고색창연하기 그지없다. 예배는 예수님이 사용했던 언어라는 아라메안으로 진행돼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나 찬송가는 정말 멋지다. 꼭 그레고리안 성가와 아랍 전통음악을 합쳐 놓은 것 같다. 하여간 이슬람이 국교인 이라크에서 역사와 전통이 깃든 초기 교회 안에 앉아있다는 자체가 감격스럽다.

모술은 인도.페르시아 및 지중해를 잇는 교통의 요지이자 초강국 아시리아의 수도로서 약 2백년간 문명세계의 중심지였다. 그래서일까. 이곳에는 아주 다양한 종족과 종교가 섞여 산다. 아랍계(60%), 쿠르드족(30%), 아시리아인, 투르크만, 그리고 공작새가 상징인 토속종교 예지디 교인도 10만명이 넘는다.

물론 각 집단이 늘 평화공존하는 건 아니다. 이곳 북부에는 4백만명의 쿠르드족이 살고 있는데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쿠르드족과 이를 막으려는 아랍 정부가 항상 팽팽히 맞서고 있다.

후세인 정권 때는 혹독한 탄압을 받았지만 세상이 바뀐 지금은 이라크 어느 곳보다 안전하고 풍요로운 지역이 됐다. 그러나 쿠르드족의 전후 득세가 바로 국내 난민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낳고 있다.

쿠르드족의 세력확장을 우려한 후세인 정권은 남쪽의 가난한 아랍인들에게 땅과 여러 가지 혜택을 준다고 꾀어 쿠르드족이 사는 북쪽으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자 쿠르드족들이 이 아랍계 이주민들을 몰아내고 있는 것이다.

모술 근방에는 그래서 생긴 국내 난민이 줄잡아 5만명 정도, 졸지에 오갈 데 없어진 아랍계 주민들은 사담 후세인궁, 이라크군 병영 등 공공건물에 대거 몰려 살고 있다.

내가 직접 가본 곳은 전쟁 전 죄수를 다 석방해 텅 빈 교도소였다. 조그맣고 깜깜한 감방에서 한 방에 한 가족씩 7백가족 정도가 임시로 거처하고 있었다. 50도가 넘는 무더위에 창문도 없는 곳에서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약 3개월간 지내면서 어려웠던 점은 살인적인 더위다. 8월 중순 모술의 최고기온은 54도. 이런 건식 사우나 같은 곳에서도 사람이 살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이곳 사람들의 삶의 속도는 라르고. 말도 걸음도 일도 천천히 한다. 꼭 슬로 모션을 보는 것 같다. 나 같이 뭐든지 스타카토로 해야 하는 사람은 확실히 더 덥다.

나의 생존방법은 아침 시간을 최대로 이용하는 거다. 오후가 되면 작열하는 햇살이 불화살이 돼 사정없이 내리꽂힌다. 일과 후 샤워를 하려고 찬물을 틀면 컵라면을 끓여먹어도 좋을 뜨거운 물이 나온다. 옥상 물탱크가 하루종일 열을 받아서다.

숙소 벽도 온돌방보다 더 따끈따끈한데 설상가상으로 전기가 하루에 4~5시간밖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천장에 붙은 선풍기가 무용지물이다. 오후에 많이 돌아다닌 날은 밤에 자려고 누우면 천장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고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린다. 더위를 먹은 탓이다.

그나마 입맛이 떨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빵이 주식일 줄 알았는데 매끼 밥도 같이 먹는다. 티그리스 강에서 잡은 엄청나게 큰 생선을 매콤 달콤하게 요리한 것은 정말 맛있다. 밑반찬으로 올리브 절임, 오이 피클, 그리고 고추장아찌 비슷한 게 있어 아쉬운 대로 한국 음식에 대한 갈증을 달래준다.

나의 모술 생활은 일견 단조롭지만 실상은 매우 다채롭다. 같이 일하는 국제 직원 덕분이다. 경력 20년 이상인 두 사람을 포함해 우리 열 명의 현장 경력 합산이 1백1년, 그야말로 백전노장팀이다.

이곳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사람들이 또 있다. 여기에서 사귄 친구들이다. 우리 팀 현지 직원들, 미군 민간협력담당관, 도미니카 수녀님, 그리고 나만 보면 입이 턱에 걸리도록 좋아하는 열살짜리 배스마. 이 꼬마 친구는 우리가 식수 사업을 하고 있는 학교 수위의 딸.

내가 이 학교를 처음 찾아간 날, 나를 보더니 얼른 자기 집에 가서 물을 떠온 아이다. 내가 땡볕에서 일하는 게 제 딴에는 안쓰러워 보였나보다. 건네주는 물을 마시는 나를 보며 좋아서 활짝 웃는 아이의 모습에 피곤이 싹 가시는 것 같았다. 더워 죽겠는데 내 옆에 딱 달라 붙어 있어도 귀찮기는커녕 무진장 살갑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 나는 이 꼬마가 보고 싶어 필요 이상으로 자주 그 학교를 찾았다.

배스마는 지난 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전쟁 때문에 학교가 문을 닫아 속상했단다. 자기 언니랑 동생은 밤에 폭탄이 떨어지면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며 울었지만 자기는 얼른 학교 옥상에 가서 구경했단다.

불꽃놀이처럼 멋지다고 했다가 아버지한테 크게 혼났단다. 전쟁이 끝난 후 사람들이 학교에 와서 마구 물건을 훔쳐가고 망가뜨리고 불을 질러 정말 미웠단다. 지금도 미군이 폭탄을 떨어뜨려 자기 식구를 죽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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