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6월 항쟁' 불지핀 민주화 운동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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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70~80년대 군사정권 시절 한국 민주화 운동 현장을 지켜온 김승훈(金勝勳.본명 마티아) 신부가 2일 오전 2시35분 숙환으로 선종(善終)했다. 64세.

고인은 87년 5월 18일 박종철군 고문 치사 조작 사건을 폭로하며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6월 민주항쟁에 불을 댕겼다. 당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천주교정의사제단) 대표였던 그는 서울 명동성당 광주민주항쟁 7주년 미사에서 "당국은 철저하게 이 사건(박종철군 사건)을 은폐했고, 그 과정 일체도 조작해서 국민을 다시 한번 속였다"고 폭로했다.

당시 이 사건 주임검사였던 안상수 검사(현 국회의원)는 "성명서의 내용은 매우 정확했고, 사정을 제대로 아는 사람의 제보임이 분명했다. 역시 비밀은 없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이 폭로로 박군 치사사건 은폐.조작에 관여했던 경찰 고위 간부들이 구속됐으며, 군사독재정권 몰락의 기폭제가 됐다. 이 폭로는 6.10 항쟁으로 이어졌고 5공 철권통치는 결국 종언을 고했다.

고인의 생애는 한국의 민주화 과정과 맥을 함께 했다. 그는 종교의 사회적 실천을 보여주며 '교회 속의 구원'이 아닌 '사회와 함께 하는 구원'을 선택했다.

고인은 74년 7월 반(反) 유신 인사로 거론됐던 고(故)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사회의 불의에 눈뜨기 시작했다. 그는 이후 결성된 천주교정의사제단에 참여하며 30여년간 민주화 운동, 양심수 석방 운동, 탈북자 지원 등에 힘썼다.

76년 3월 함세웅 신부(서울 상도동 주임), 고(故) 함석헌옹 등과 함께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해 유신정권 시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98년 8월 문규현 신부와 함께 방북해 북한동포 돕기 운동도 벌였고, 올해에도 새만금 살리기 '3보 1배' 현장을 찾아 격려했다.

'투사' 이미지와 달리 평소 고인은 무척 과묵하고 정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천주교정의사제단 초창기부터 고인과 함께 활동했던 김택암 신부는 "겉으론 거만하다는 오해를 줄 만큼 뻣뻣해 보였으나 실은 마음이 부드러워 큰 소리 한번 치는 걸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4년 전 발간된 金신부의 회갑 문집 '당신께서 다 아십니다'(빛두레)에도 고인의 성품이 잘 드러난다. 그는 이 책에서 민주화 현장의 중심에 서 있던 자신을 "별 것도 아닌 사람"으로 표현했고,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뛰었던 그의 활동도 "하다 보니 그리 됐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함세웅 신부는 "그는 항상 '괜찮아, 하느님께서 다 해 주실 텐데'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39년 평남 진남포에서 태어난 고인은 62년 가톨릭대를 졸업하며 사제 서품을 받았다. 96년부터 서울 시흥동 성당 주임신부로 있던 그는 2001년 안식년을 맞아 쉬던 중 영원한 안식을 찾았다.

한편 정부는 金 신부가 생전 그리스도 정신을 바탕으로 노동.인권.민주화 운동에 기여한 공을 기려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키로 했다. 고인의 유해는 서울 명동성당에 안치됐으며, 장례 미사는 4일 오전 10시 명동성당 대성당에서 거행된다. 장지는 경기도 용인 서울대교구 공원 묘지 내 성직자 묘역. 02-777-0641~3.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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