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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암호화폐 열풍은 새 디지털시대 전주곡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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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오정근 한국금융ICT융합학회장

오정근 한국금융ICT융합학회장

박상기 법무부 장관은 지난 11일 암호화폐를 ‘돌덩어리’로 규정하며 암호화폐 거래소 폐쇄 조치를 밝혔다. 이에 가격이 급락하고 암호화폐 규제에 반대하는 청원이 쇄도하자, 청와대는 “정부 입장이 아니다”고 해명해 혼란을 가라앉혔다. 은행의 가상계좌 실명 작업 중단, 신규 가상계좌 금지 방침도 이달 말까지 실명 작업을 완료하겠다고 선회했다.

디지털시대의 핵심으로 부상한 #암호화폐 혼선은 이해 부족 때문 #과도한 규제는 혁신의 싹 잘라 #범죄는 단죄하되 산업은 육성해야

이런 혼란은 기술혁신기에 종종 나타나는 현상으로, 암호화폐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됐다. 2000년 전후 IT 버블도 대단한 혼란을 초래했지만, 그 과정을 통해 국내외 굴지의 IT기업들이 탄생해 인터넷1.0시대를 이끌고 있다. 이제 인터넷2.0 시대가 열리고 있다.

화폐의 역사는 상품화폐에서 금속화폐를 거쳐 법정화폐로, 거래의 편리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이제 세계는 4차산업혁명의 원동력인 ‘디지털 전환’이라 불리는 디지털시대가 만개하려 한다. 디지털시대에는 모든 것이 디지털 공간에서 거래된다.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시공을 초월해 생산자·소비자가 디지털 공간에서 연결돼 쌍방(P2P)거래를 하는 진정한 프로슈머시대다.

디지털시대 P2P 거래를 금융 면에서 종결짓는 화폐가 가상화폐·디지털화폐로 불리는 암호화폐다. 제3의 중개기관 없는 쌍방거래에 따른 보안 문제를 모든 거래자가 전자거래원장을 분산 보관하는 블록체인이 해결하고 쌍방거래 결제를 종결지을 수 있다. 스마트폰·블록체인·암호화폐는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삼위일체다. 모두 2009년 즈음 동시에 등장한 것이 우연이 아니다.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로 기축 통화인 달러의 위기에 등장해 새 패러다임(판)을 열어가고 있다.

판이 바뀔 때는 새 판에 먼저 올라타는 자가 승자가 된다. 미국·일본 등이 암호화폐를 새 화폐나 금융상품으로 인정한다. 글로벌 기업들도 독자적 암호화폐를 발행하려 한다. 중앙은행들도 암호화폐 발행을 준비 중이다.

시론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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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암호화폐 규제를 보면 영국 정부가 1865년 마부의 일자리 보호를 목적으로 만든 적기조례(Red Flag Act)가 떠오른다. 한 대의 자동차에는 운전사·기관원·기수 3명을 고용하고, 기수는 붉은 깃발을 들고 55m 앞에서 자동차를 선도하며, 최고 속도는 시속 6.4㎞로 제한했다. 영국에서 자동차가 발명됐지만, 마차보다 빨리 달릴 수 없게 한 적기조례가 30년간 시행되며 자동차산업을 독일에 내줬다.

국내 암호화폐 거래자는 300만에 육박하고 절반 정도가 30대 중반 이하 청년이다. 청년이 비전 없는 사회에서 마지막 희망으로 매달리고 있다는 식의 보도는 이들을 깎아내리는 분석이다. 암호화폐 광풍에 편승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분야를 주도하는 청년들은 블록체인·암호화폐의 가능성을 보고 투신한 혁신 기업가다. 이들은 디지털 이주민인 50~60대 기성세대가 블록체인·암호화폐가 무엇인지도 모를 때 관련 업계에 종사하다 길게는 5~6년 전, 짧게는 3~4년 전부터 이 분야에 뛰어들었다.

구글·페이스북 창업자들도 대학생 시절 창업했다. 이더륨은 대학 입학 전에 만들었다. 이는 젊은 세대가 미래를 이끌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인터넷1.0 시대 구글·페이스북 창업자들이 20~30대에 억만장자 대열에 올라서며 실리콘밸리를 이끌고 있다. 인터넷2.0 시대 비트코인·이더륨·리플의 창업자가 다시 20~30대 억만장자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런 청년들이 많이 나오도록 지원해 판교밸리·송도밸리가 만들어져야 한다. 규제 때문에 한국을 떠나는 청년들을 보면서 너무도 안타까운 심정이다. 불확실성 속에서 선개발·선투자에 대한 보상에 인색한 사회는 혁신이 안 된다.

새로운 혁신이기 때문에 기존 법에는 포괄돼 있지 않아 영세 거래소가 난립하고 불완전한 암호화폐가 등장한다. 이를 악용한 투기·사기가 횡행하고 투자자 피해가 늘며 블록체인·암호화폐 산업에 혼란이 일고 있다. 이를 막기 위해 정부는 전문가의 소리에 귀를 열어야 한다. 암호화폐의 성격을 규정하고 제도권으로 편입해 법령을 제정, 범죄는 단죄하되 투자자는 보호하고 관련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

블록체인은 육성하고 암호화폐는 규제하자는 주장은 기술의 본질을 모르는 주장이다. 암호화폐는 거래자들이 블록을 쌓아서 체인으로 연결하는, 채굴이라는 작업에 대한 보상으로 지급되는 과정을 통해 발행된다. 거래는 블록체인으로 하고 결제는 아날로그 시대 법정통화로 하면 거래 효율성이 반감돼 블록체인산업마저 경쟁력을 상실하게 된다.

오정근 한국금융ICT융합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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