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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비판 기사에 악플 많다 지적에 “담담하게 생각하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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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30분여에 걸친 신년사 발표를 마친 문재인 대통령은 의자에 앉았다. 물을 한 모금 마신 그는 참모진이 준비한 묵직한 ‘모범답안’ 서류를 책상에 올려뒀다. “질문을 시작한다”는 사회자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의 말이 나오자 청와대 영빈관에 있던 200여 명의 기자가 일제히 손을 들었다. 문 대통령은 누구에게 질문권을 줄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각본없는 백악관식 1시간 회견 #질문지·질문자 정하지 않고 진행 #발언권 위해 ‘수호랑’ 흔든 기자도 #대통령, UAE 질문엔 굳은 표정

10일 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은 이전 정부 때와 달리 사전에 질문지와 질문자를 정하지 않고, 문 대통령이 직접 질문권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윤 수석은 회견 전 “대통령이 손으로 지명하고 눈을 마지막으로 맞춘 기자가 질문할 수 있다”며 “‘나도 눈을 맞췄다’고 일방적으로 일어나면 곤란하다”고 말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13명의 기자가 질문권을 얻었다. 문 대통령의 눈에 띄기 위해 평창올림픽을 알리는 플래카드를 들어올리거나 마스코트인 ‘수호랑’ 인형을 흔드는 경우도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전 청와대에서 새해 국정운영 구상을 밝히는 신년 기자회견을 했다. 문 대통령이 입장하며 출입기자단과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전 청와대에서 새해 국정운영 구상을 밝히는 신년 기자회견을 했다. 문 대통령이 입장하며 출입기자단과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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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은 답변이 진행된 한 시간 동안 준비한 답안지는 거의 들춰보지 않았다. 대신 참모들이 질문의 요점과 기자의 신상을 프롬프터에 띄워 참고할 수 있도록 했다. 한 기자가 위안부 합의와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에 대해 질문을 던지자 문 대통령은 “질문을 하나만 선택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대부분의 질문에 즉각 반응했다. 그러나 임종석 비서실장의 아랍에미리트(UAE) 특사 파견과 관련한 질문을 받자 굳은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배석한 임 실장의 표정도 굳어졌다. 반면 경제성장률과 혁신성장 등을 묻는 질문에는 먼저 개략적 설명을 한 뒤 장하성 정책실장에게 구체안을 설명하도록 하는 여유를 보였다.

솔직한 답변도 눈에 띄었다. 문 대통령은 ‘청와대 및 2기 내각의 방향성’을 묻는 질문에 잠시 뜸을 들였다. 사회를 맡은 윤 수석이 “저와도 관련된 질문인데…”라고 운을 떼자 문 대통령은 “질문이 뜻밖이다. 아직 아무런 생각이 없는 문제에 대한 질문”이라며 웃음으로 받아 넘겼다. 외신 기자가 “남북 회담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공을 평가해달라”고 하자 “트럼프 대통령의 공은 매우 크다. 감사를 표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자신의 열성 지지자들이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에 악성 댓글을 다는 현상에 대해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한 기자가 이와 관련, “지지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묻자 문 대통령은 “정치 하는 사람들은 제도권 언론의 비판뿐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문자를 통해, 댓글을 통해서 많은 공격을 받기도 하고 비판을 받아 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자들도 그런 부분에 대해 좀 담담하게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너무 예민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대한민국에서 저보다 많은 악플이나 문자를 통해 비난이나 여러 (비난) 트윗 등을 많이 당한 정치인은 없을 것”이라며 “그냥 유권자의 의사표시라고 받아들인다”고 덧붙였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경쟁 후보들이 “문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조직적으로 ‘문자폭탄’을 보낸다”고 반발하자 “경쟁을 더 흥미롭게 만들어 주는 양념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백악관식 회견’에 익숙한 외신 기자들은 대통령의 질문권을 얻으려는 취재 열기에 관심을 보였다. 회견이 끝난 뒤 영국 BBC의 로라 비커 기자는 트위터에 “워싱턴과 서울의 언론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문 대통령은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free for all) 질문들에 답하는 데 한 시간가량을 썼고, 언론에 자유롭게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고 적었다.

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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