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여에 걸친 신년사 발표를 마친 문재인 대통령은 의자에 앉았다. 물을 한 모금 마신 그는 참모진이 준비한 묵직한 ‘모범답안’ 서류를 책상에 올려뒀다. “질문을 시작한다”는 사회자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의 말이 나오자 청와대 영빈관에 있던 200여명의 기자들이 일제히 손을 들었다. 문 대통령은 누구에게 질문권을 줄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文 대통령, 즉석으로 질문자 지명한 '백악관식' 회견 #평창올림픽 마스코트 인형 들며 '질문권' 쟁탈 경쟁
10일 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은 이전 정부때와 달리 사전에 질문지와 질문자를 정하지 않고, 문 대통령이 직접 질문권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윤 수석은 회견 전 “대통령이 손으로 지명하고 눈을 마지막으로 맞춘 기자가 질문할 수 있다”며 “‘나도 눈을 맞췄다’고 일방적으로 일어나면 곤란하다”고 말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13명의 기자가 질문권을 얻었다. 문 대통령의 눈에 띄기 위해 평창올림픽을 알리는 플래카드를 들어올리거나 마스코트인 ‘수호랑’ 인형을 흔드는 경우도 있었다.
문 대통령은 답변이 진행된 1시간 동안 준비한 답안지는 거의 들춰보지 않았다. 대신 참모들이 질문의 요점과 기자의 신상을 프롬프터에 띄워 참고할 수 있도록 했다. 한 기자가 위안부 합의와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ㆍ사드) 체계 배치에 대해 질문을 던지자, 문 대통령은 “질문을 하나만 선택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대부분의 질문에 즉각 반응했다. 그러나 임종석 비서실장의 아랍에미리트(UAE) 특사 파견과 관련한 질문을 받자 굳은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배석한 임 실장의 표정도 굳어졌다. 반면 경제 성장률과 혁신성장 등을 묻는 질문에는 먼저 개략적 설명을 한 뒤, 장하성 정책실장에게 구체안을 설명하도록 하는 여유를 보였다.
솔직한 답변도 눈에 띄었다. 문 대통령은 ‘청와대 및 2기 내각의 방향성’을 묻는 질문에 잠시 뜸을 들였다. 사회를 맡은 윤 수석이 “저와도 관련된 질문인데…”라고 운을 떼자, 문 대통령은 “질문이 뜻밖이다. 아직 아무런 생각이 없는 문제에 대한 질문”이라며 웃음으로 받아 넘겼다.
문 대통령은 자신의 열성 지지자들이 정부에 비판적 기사에 악성 댓글을 다는 현상에 대해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한 기자가 이와 관련 “지지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문자, 문 대통령은 “정치하는 사람들은 제도권 언론의 비판뿐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문자를 통해서, 댓글을 통해서 많은 공격을 받기도 하고 비판을 받아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자들도 그런 부분에 대해 좀 담담하게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너무 예민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대한민국에서 저보다 많은 악플이나 문자를 통해 비난이나 여러 (비난) 트윗 등을 많이 당한 정치인은 없을 것”이라며 “그냥 유권자의 의사표시라고 받아들인다”고 덧붙였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경쟁후보들이 “문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경쟁 후보들에게 조직적 ‘18원 후원금’, ‘문자 폭탄’, ‘비방 댓글’을 보낸다”고 비판하자 “치열하게 경쟁하다 보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경쟁을 더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 같은 것”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한편 ‘백악관식 회견’에 익숙한 외신 기자들은 대통령의 질문권을 얻으려는 취재 열기에 관심을 보였다. 회견이 끝난 뒤 영국 BBC의 로라 비커 기자는 트위터에 “워싱턴과 서울의 언론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문 대통령은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free for all) 질문들에 답하는데 한 시간 가량을 썼고, 언론에 자유롭게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고 적었다.
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