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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위안부 합의에 상처 실컷 낸 정부 "재협상은 안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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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9일 오후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 브리핑실에서 한일 위안부 합의 처리 방향과 관련한 정부 입장을 발표한 뒤 브리핑룸에 들어서고 있다. 오종택 기자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9일 오후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 브리핑실에서 한일 위안부 합의 처리 방향과 관련한 정부 입장을 발표한 뒤 브리핑룸에 들어서고 있다. 오종택 기자

 정부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재협상을 일본에 요구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해당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선언했다. 또 일본 측이 출연한 화해·치유 재단 기금의 추가 사용도 중지했다. 합의를 파기하지 않으면서 핵심적 요소는 부정한 셈이다.

TF발표 뒤 “국가 간 약속이지만 문제 해결 안돼” 파기 시사 #→“해결 안됐지만 약속이니 파기 안해” 12일만 입장 변경 #10억엔 지급 중단 등 핵심 요소는 부정…日 "진의가 뭐냐"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9일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한·일 위안부 합의 처리 방향 관련 발표’를 통해 “합의에 대해 일본 정부에 재협상은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일 측이 스스로 국제 보편 기준에 따라 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피해자들의 명예·존엄 회복과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한 노력을 계속해줄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노력’과 관련해서는 “피해자 할머니들이 한결같이 바라신 것은 자발적이고 진정한 사과”라고만 했다.

 강 장관은 “피해 당사자인 할머니들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은 2015년 합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진정한 문제 해결이 될 수 없다”는 입장도 다시 확인했다. 합의에 들어 있는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에 대한 부정이다. 그러면서도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기로 한 이유에 대해 “양국 간의 공식 합의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했다”고 설명했다.

 강 장관 직속 위안부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TF)는 지난달 27일 박근혜 정부가 피해자들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일본과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튿날 “지난 합의가 정부 간의 공식적 약속이라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이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며 파기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런데 이 논리가 12일 만에 ‘해결되지 않았지만, 국가 간 공식 합의이므로 파기하지 않는다’로 바뀐 것이다.

 정부가 가장 고심했던 출연금 10억엔 처리에 대해 강 장관은 “우리 정부 예산으로 충당하고, 이 기금의 향후 처리 방안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와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가 낸 10억엔 중 약 4억엔은 이미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지급이 완료됐다. 정부는 나머지 6억엔은 재단 계좌에 그대로 보관하고, 이와 별도로 예비비로 10억엔을 편성해 이 돈을 어떻게 쓸지 일본과 협의하겠다는 입장이다. 출연금 반환은 아니지만, 합의의 핵심에 대한 후속 조치 중단이다.

 이날 발표는 위안부 합의에 대한 국내적인 반대 여론과 한·일 관계를 모두 고려한 절충안 성격이다. 문 대통령은 대선 후보 때 위안부 합의 재협상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후 TF 활동과 정부의 후속 조치는 이에 따른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소녀상 관련 내용이 합의에 들어간 경위 등 그간 제기됐던 의혹에 대한 답도 상당 부분 밝혀졌다. ‘절차적 정당성’ 확보 노력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 30년 이상 비밀로 묶여 있어야 하는 국가 간 교섭 내용을 2년 만에 모두 공개하는 부적절한 선례를 남겼다. 일본의 반발을 산 것은 물론이고,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신뢰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결정이었다. 특히 중대한 하자가 있다면서도 정작 이를 바로 잡지는 못하는 모순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2014년 일본 아베 정부가 고노담화를 검증하면서 일본의 사죄를 정치적 흥정의 결과물처럼 폄하해 상처를 내놓고선 결국에는 계승하겠다는 입장을 확정한 것과 닮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도 당시 자신의 국내 지지층인 우익 세력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검증을 했고, 이는 한·일 관계에 대형 악재로 작용했다.

 강 장관의 발표 뒤 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외상도 즉각 비판적 반응을 보였다. 특히 10억엔을 한국 예산으로 충당하는 데 대해 “그 진의에 대해 확실히 설명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이같은 조치는 우리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히는 것이 될 수 있다”며 “피해자 47명 중 36명이 화해·치유 재단 지원금을 받은 상황에서 일본에 추가 조치를 요구하면 향후 위안부 문제 논의의 동력 자체를 얻기가 힘들고 한·일 간에 감정의 응어리로 남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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