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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쓰니 글씨가 뛰어놀더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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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초서와 전서를 조화시킨 '초전체'로 쓴 황진이의 시 옆에 선 권창륜씨는 ’새해 기 받으러 오시라“ 했다.

초서와 전서를 조화시킨 '초전체'로 쓴 황진이의 시 옆에 선 권창륜씨는 ’새해 기 받으러 오시라“ 했다.

뺨을 감싼 흰 수염이 도인의 풍모다. 초정(艸丁) 권창륜(77) 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 이사장은 점 하나 제대로 찍으려 몇 십 년을 수련한 서예가다. 10일까지 서울 인사동 백악미술관에서 열리는 ‘심장별곡(心匠別曲)’은 희수(喜壽)를 맞아 긴 세월 연마한 서예 역정을 추슬러 보는 자리다. 백두산 천문봉에 올라 일필휘지한 ‘황고(荒古)’부터 한라산 영실휴게소에서 쓴 ‘영주십경(瀛洲十景)’까지 산천경계의 기(氣)를 손끝에 결집시킨 40여 점 근작을 내놨다.

초정 권창륜 희수전 ‘심장별곡’ #작품 기운 살리려 양손·취필 실험도 #3월 국새와 인장 모은 예술관 개관

“서예에 관한 온갖 이론을 섭렵하고, 명필과 교류하며 60여 년 매진하고 보니 결국 중국 위나라 문장가 조비가 지은 『전론(典論)』의 한마디가 남더군요. ‘문이기위주(文以氣爲主)’라. 글은 기로써 주인을 삼는다는 뜻입니다. 기운생동을 한번 살려보자고 별별 실험을 다했습니다. 붓과 먹을 가리지 않았고, 왼손과 오른손을 다 썼으며, 취필(醉筆)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거리끼거나 얽매임 없이 마음 가는대로 쓴 글씨는 규범을 벗어난 자유로움으로 뛰논다. 얼핏 암각화의 탁본처럼 보이는 ‘유우예(遊于藝)’는 서성(書聖)이라 불렸던 왕희지의 ‘입목삼분(入木三分)’을 실험해본 것이다. 필력이 얼마나 좋던지 단단한 나무를 3푼이나 파고들었다는 전설을 좇아 화선지 다섯 장을 겹쳐놓고 글씨를 썼는데 세 장째까지 먹이 스며들어 남녀가 춤추는 형상이 남았다.

“붓을 놓아버린 이 땅의 선비와 지식인 처지가 안타까워 2009년 고향인 경북 예천에 초정서예연구원을 세웠지요. 오는 3월에는 그 옆에 ‘대한민국 인학(印學) 예술관’을 개관합니다. 역대 국새와 인장 자료를 모아 우리나라 전각예술의 우수함을 살필 수 있도록 한 인보박물관이죠.”

초정은 요즘 장년층에 불고 있는 서예 공부 바람을 격려한다며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이 녹아들어 더 순수한 글씨가 나오더라”고 했다. 그는 “멋지게 쓰겠다고 어깨에 힘을 주지 말고 선(線)을 무심히 그어본다는 기분으로 하라”고 조언했다.

글·사진=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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