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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CoverStory] Business Dining "술 상무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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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경영하는 회사의 미래가 오늘 한 끼의 저녁식사에 달려 있다면…. 벽에 걸린 액자 하나, 테이블에 놓인 유리 잔 하나, 나오는 음식 하나하나까지 신경이 안 쓰일 수 없을 터다. 그것이 비즈니스 다이닝이다. 서울 삼성동 광둥식 요리 전문점, 크리스탈 제이드에서 만찬을 즐기고 있는 최홍 랜드마크자산운용 사장(中)과 김경준 딜로이트-안진회계법인 파트너.

한 끼에 10만원이 넘는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있습니다. 한 병에 100만원이 넘는 고급 포도주를 곁들이기도 하지요. 물론 수억, 수십억원의 연봉을 받는 이들이 단골입니다. 기업 CEO나 고위 임원들 말입니다. 비싸고 좋은 것만 먹는다고 그저 눈 흘길 일만도 아닙니다. 그들이 그런 식당에서 그런 음식과 그런 포도주를 들고 있다면 그것이 '일'일 경우가 많습니다. 흔히 말하는 '접대'지요. 직위가 올라가고 수입이 많아질수록 누구를 대접할 일이 많아지고 그 책임은 무한정입니다. 업무시간도 낮과 밤이 따로 없겠지요. 오히려 밤에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만남이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아낌없이 투자할밖에요. 그런데 그런 접대 문화가 달라지고 있답니다. 1차에서 2차, 3차로 이어지던 술집 순례가 사라져 갑니다. 그 자리를 격조있는 정찬이 대신합니다. 이른바 비즈니스 다이닝(Business Dining)입니다. 서민들에게는 문턱 높은 '그들'만의 얘기지만 한번 들여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할 크고 작은 만남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의 노하우를 배워보자고요. 허름한 분식집에서도 응용할 게 분명 있을 테니까요.

글=이나리 기자 <windy@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요정 분위기 한정식집에서 비즈니스 레스토랑으로
폭탄주 돌리는 2,3차 대신 식사에 곁들인 가벼운 반주

비즈니스 레스토랑이라 해서 모두 폐쇄적인 것은 아니다. 파트너와 제법 친분이 쌓인 뒤라면 깔끔하면서 별미를 맛볼 수 있는 식당을 고르기도 한다. 사진은 서울 청담동의 이탈리아 가정식 레스토랑 ‘미 피아체’.

최홍 랜드마크자산운용 사장. 금융권 차세대 리더로 꼽히는 그의 저녁은 그의 것이 아니다. 국내에선 물론 해외 출장 중에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약속, 약속들. 대접받기보다 대접해야 하는 일이 많은 만큼 메뉴 고르고 장소를 잡는 것 또한 업무의 연장이다.

"3, 4년 전만 해도 한정식집에서 시작해 룸살롱으로 이어지는 것이 1급 접대의 정석이었어요. 요즘은 정말 달라졌죠. 그 코스를 밟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일본에서도 지난달, 고이즈미 총리의 단골집이던 유명 요정 긴류(金龍)가 문을 닫았다 하지 않나. 우리나라에선 아직 요정 비슷한 한정식집에서 정치인이 성추행 추태를 부리는 지경이지만, 재계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폭탄주 대신 포도주를 마신다. 룸살롱보다는 와인바와 멤버십 라운지를 선호한다. 칼로리 높은 한식.중식보다는 일식.프랑스식.이탈리아식이 대세다. 장소도 호텔 일색에서 서울 청담동.삼청동.한남동의 고급 레스토랑들로 분화돼 가고 있다. 본격적인 비즈니스 다이닝의 시작이다. 디디에르 벨투와즈 인터컨티넨탈호텔 총지배인은 "비즈니스 다이닝이란 정찬을 나누며 상대와 친분을 쌓고 비즈니스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어디서 어떤 스타일의 디너를 갖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장소를 정한 사람의 센스, 취향, 교양의 정도, 비즈니스 스타일까지 가늠케 하기 때문이다. 비즈니스 레스토랑의 제1조건은 조용함, 그리고 보안이다. 얼굴 알려진 이들은 자신이 누구와 밥 먹고 술 마시는지 남이 알길 원치 않는다. 정치인, 고위 공직자와의 만남일 땐 특히 더하다. 룸을 선호할 뿐 아니라, 가능하면 동선 그 자체조차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룸'의 개념이 없다시피 한 서양에서도 중요한 만남은 요트클럽.골프클럽 등 지극히 폐쇄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38층에 있는 멤버십 클럽 메트로폴리탄의 경우 홀은 아예 없으며 복도조차 미로 같아, 처음 간 이는 문을 찾기 힘들 정도다. SK텔레콤과 삼성그룹 임원, 은행권 인사, 고위 공직자들이 자주 찾는다. 여의도 63빌딩 55층의 가버너스 챔버, CCMM빌딩 12층의 서울시티클럽 등에는 증권가 CEO, 유력 정치인, LG그룹 임원들의 발길이 잦다. 이런 멤버십 클럽 가운데는 메뉴판에 아예 가격을 써놓지 않는 곳도 있다.

오너 경영자들의 경우 아직은 호텔 선호가 뚜렷한 편. 팬택앤큐리텔 박병엽 부회장은 하얏트호텔 일식당 아카사카를 즐겨 찾는다. 이곳은 다채로운 사케 리스트로 유명한데, 박 회장이 초대한 이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먹던 대로 달라"고만 하면 평소 즐기는 술.안주.식사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SK그룹의 한 고위임원은 "외국 손님을 모실 땐 아무래도 호텔을 찾게 된다.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키는 덴 아무래도 그쪽이 미덥기 때문"이라고 했다.

1, 2년 전부터는 호텔에서 벗어나 삼청동.청담동 등지의 고급 레스토랑이며 와인바를 찾는 이들도 부쩍 늘었다. 삼청동의 '두가헌', '더 레스토랑' 등이 한창 뜨고 있는 곳. 종로구 수운회관 옆 '민가다헌', 청와대 부근 '더 소셜' 등도 요즘 뜨는 비즈니스 레스토랑이다. 고위 공직자들, 삼성.SK 그룹 및 외국계 기업 임원들, 교수들이 주류를 이룬다.

청담동은 고급 비즈니스 다이닝 레스토랑의 집산지. '명품 정찬 레스토랑'을 뜻하는 '오트 다이닝(Haute Dining)'이 즐비하다. '테이블2025' 등 청담동 유명 빌딩 인테리어를 여럿 담당한 B&Ainc 배대용 소장은 "이 곳에선 음식도 패션이요 디자인이다. 식당마다 독특한 컨셉트를 자랑한다"고 했다. 고객들은 최상의 서비스를 받으며 1인당 10만~20만원의 디너 코스를 즐긴다.

'두가헌' '민가다헌' 운영자이자 와인수입사 아영 대표인 우종익 사장은 "밥 한 끼에 무슨 10만원이냐 할지 모르지만 요정이나 룸살롱을 생각해 보라. 15만~30만원짜리 포도주 한 병을 보탠다 해도 두 사람에 50만~60만원이면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페트뤼스(150만~300만원) 같은 명품 포도주를 주문하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우 사장은 "서양처럼 우리나라에서도 포도주는 사회적 지위를 증명하는 일종의 상징"이라고 설명했다.

서양식 비즈니스 다이닝에는 그래서 소믈리에가 필수다. 와인 리스트가 뛰어나야 하며,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의 취향과 식성, 선호하는 분위기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레스토랑 '마라퀘시'의 이판근 조리장은 "손님이 선택한 포도주에 따라 즉석 메뉴를 만들거나 소스를 바꾸어 내는 것은 기본"이라고 했다. 메뉴판은 제철 재료에 따라 한 달에 한 번 꼴로 바꾸며, 인공 조미료 사용은 금기에 속한다. 고급 와인바에는 예외 없이 쿠바산 고급 시가가 비치돼 있다.

고승덕 변호사는 "요즘은 나이 상관없이 과음을 꺼리는 분위기다. 외국의 경우 유명 비즈니스 레스토랑에서 진행되는 3~4시간의 다이닝이면 최고의 대접을 받은 것으로 친다. 우리나라에서도 2차, 3차로 이어지는 접대 관행은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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