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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교포의 고향방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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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사할린(화태)교포의 비극은 곧 강대국에 희생된 우리 근대사의 비극이다. 전전에는 일제에 징용되고, 전후에는 소련에 의해 억류당하고있는 이들의 문제는 국제협력 없이는 해결되기 어렵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등장이후 소련의 정책이 전반적으로 개방화하면서 사할린 교포문제의 해결기미가 싹트기 시작했다.
86년 동경서 열린 소 일 외상회담에서 소련이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사할린교포의 출국문제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약속한바 있다.
그후 일본에서 사할린 교포가 한국의 가족, 친척을 면회할 기회는 많아졌지만 아직도 제한된 극소수에만 허락돼 있을 뿐이다.
지금의 문제는 그들이 가족과 친척이 있는 한국까지의 여행과 이산가족의 재결합, 그리고 거주지 선택 등의 자유보장이다.
최근 소련의 적십자사 의장「베네티크도프」씨가 사할린교포의 한국여행을 허용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소련의 이런 의사를 현실화시키는 것이 한일양국의 당면 과제다.
지금 사할린엔 제3세대까지 포함하여 6만명의 한국인들이 살고있다. 그중 다수는 회유와 협박, 그리고 생활고에 못이겨 북한 또는 소련의 국적을 선택했다. 그러나 3천여명은 한국인으로 남기위해 아직도 「무국적」으로 남아 귀국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까지 이들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일본의 무책임, 소련의 폐쇄정책, 그리고 북한의 방해 때문이었다.
원래 그들은 전쟁에 좇긴 일본이 징용으로 끌고간 30대의 조선인 청년들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패전하자 일본은 거기에 있던 31만명의 일인만 데리고 나오면서 우리 동포들은 그대로 방치했다. 그후 여러차례 우리정부의 항의와 요구가 있었지만 일본은 끝내 성의를 다하지 않았다.
소련은 전후 사할린을 다시 정복한 후 한국인들의 귀국을 허용치 않았다. 냉전체제에서의 이데올로기차이에 따른 폐쇄정책과 노동력부족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의 정책을 더욱 경직케 한 것은 북한이다. 소련은 부분적으로나마 사할린 교포의 출국허용 문제를 몇차례 고려했었으나 그때마다 북한이 끼어들어 방해했다. 그들을 도와주어야 할 입장에 있는 북한이 오히려 방해했다는 것은 비민족적 행위로 규탄돼야 한다.
사할린은 서울서 비행기로 3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다. 대만정도의 거리밖에 안되는 그곳에 아직도 국제고아가된 전쟁 피해자들이 발이 묶인채 남아있다는 것은 「인류양심의 문제」다.
지금까지 그들의 비극을 덜어주기 위해 어려운 가운데서도 노력해온 대구의 「중소 이산가족회」, 서울의 「국제인권옹호위 한국연맹」등의 인도주의 단체들과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업적은 높이 평가돼야한다. 지금의 부분적인 상면과 서신교환은 그들의 봉사정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민간차원의 운동만으로는 근본적 해결이 불가능하다. 이젠 정부차원의 사업으로 적극화돼야 한다. 적십자사간의 협력도 필요한 단계다.
서울 올림픽엔 많은 소련인들이 온다. 이를 계기로 한소 관계가 비록 비정치적, 민간차원의 수준이긴 하겠지만 한층 넓어질 전망이다. 이런 흐름속에서 사할린교포문제는 더욱 적극적으로 다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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