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류청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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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이호철<소설가>
옛날 한때 유럽에서는 이탈리아를 「거지의 왕국」이라고 불렀는데, 요즘은 프랑스가 그렇다고 한다. 가장 앞서있는 선진국의 하나인 프랑스에 거지가 많다니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로 요즘 프랑스에는 대학교수 출신의 거지가 날로 늘어나고 있어 당국이 골치를 앓고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필자가 몇년 전에 파리에 갔을 때 남달리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것도 그런 거지였다. 품위있게 잘 생긴 늙은이 두엇이 어릿광대같은 울긋불긋한 차림으로 공원입구에 앉아 싸구려 포도주를 사이좋게 나누어마시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이댔더니 삐딱하게 누운 포도주병까지 바로 고쳐세우면서 의젓하게 포즈를 취해주었다. 그러나 사진을 다 찍고나자 어김없이 손을 내밀어, 이를테면 출연료를 요구하였다. 몇푼 뜯기긴 했지만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나쁘긴커녕 그들의 그 얼근히 취해있는 모습은 무언지 사람살이의 근원적인 자연스러움과 허심탄회함이 서려있어 묘한 감회마저 느끼게 해주었다. 역마살이 된통으로 끼여 팔자대로 거지로 사는데, 누가 간섭이냐는 식이었다. 독신으로 평생을 교사·교수직에 있다가 늙어서 현직에서 물러나 자유스럽게 누구의 간섭도 안받고 거지로 살아간다! 그래서 대체 어쨌다는 말인가.
그때 필자가 겪은 그 두늙은이도 바로 그런 거지였는지도 모른다. 그런 종류의 거지가 지천으로 늘어날때는 물론 문제겠지만 사회문제로까지 크게 대두되지 않는 정도일때는 차라리 그나름대로 자연스러워 보일 법도 하다.
그런 사람도 살고 저런 사람도 살아서 비로소 제대로 따뜻하게 사람 사는 세상인 것이다. 거지가 한사람도 없는 나라, 그쪽이 도리어 이상한 나라임에 틀림없다.
한데 이건 반 우스갯소리지만 요즘 세계에서 가장 거지가 없는 나라가 바로 우리 한반도, 남한과 북한이라고 한다. 자,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해야할까. 거지가 한 사람도 없어서 과연 우리 한반도는 살기좋은 나라이고 이상사회이고 지상낙원일까.
천만에, 실은 그 반대일 것이다. 작년의 형제복지원같은 것이 그 증거였다. 모든 것이 어거지로, 혹은 겉치레로 돌아간다는 예증이다.
거지가 한사람도 없는 나라, 듣기에도 벌써 딱딱하고 부자연스럽고 전시성 겉치레 냄새부터 물씬 난다. 제대로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라 헹복, 행복하고 소리소리 지르는것 같은 어거지가 느껴진다. 그리고 거기 잇달아서 떠오르는 것은 형제복지원장의 얼굴, 왕년의 「통대대의원들」같은 유지들 얼굴, 욕심많고 정력좋은, 어디서나 잘난체하며 설치려고 드는 얼굴, 때와 장소를 가리지않고 대중들 앞에 나서서 악악 거들먹거리며 연설같은거 하기 좋아하는 얼굴, 위선의 가면을 몇켭으로 휘감은 얼굴, 그런 징글징글한 얼굴들이다.
사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그런 얼굴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다. 갖은 좋은 소리는 도맡아놓고 다 하지만, 탐욕으로만 뭉둥그려진얼굴, 인생은 오로지 승부라며 남보다 뛰어나고, 잘나고, 잘 살고싶어 환장하고, 한자리 얻어걸리라고 이리저리 미쳐 날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사람들은 국가유공자의 훈장이나 상장도 네댓개씩 타고, 달고, 돌아간다. 그리고 으례 그사람들은 제철이 오면 슬슬 금배지 쪽을 넘보며 이리저리 기웃거린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대거 나서는 철이 또오고 있다. 국회의원 선거.
바로 며칠 전에는 영국의 가장 권위를 자랑하는 신문인 『더 타임스』가 장장 8면에 걸친 한국특집기사를 냈는데, 한국이 21세기에 세계 10대 경제대국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현재의 추세대로 간다면 오는 2000년을 전후해 이탈리아·영국·프랑스등의 국민총생산을 능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한다. 또한 국제노동기구(ILO)가 한국인들을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국민들로 분류해놓고 있으며 경제성장률이 서구의 4배에 이르고 있다고 격찬했다고 한다.
과연 그 정도인가. 우리의 모습이 바깥에서도 그렇게 활기차게 보이는가 하고 마음 든든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한편으론 역시 현기증이 일면서 슬그머니 프랑스에 날로 늘어난다는 그 교수·교사출신의 거지가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난다 긴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모두 금배지쪽을 넘본대서야 사실 이건 너무 피곤하지 않은가.
그중의 다만 두엇이라도 철인거지로 나서서 공원입구에 앉아 오징어다리에 소주라도 사이좋게 나누어 마시는 것을 보게되면, 그나마 숨통이 트일것 갈다. 그렇게 되어야 온전하게 사람사는 따뜻한 세상이고, 제대로 사람사는 버라이어티도 있을 것이 아닌가.
발전과 성장이라는 급류에 휘말려들어 너나 없이 너무 영악해가고 너무 여유가 없고, 너무너무 두눈에 핏발들이 서 있다.
대저, 잘 산다는 진짜 뜻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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