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now] 히잡 쓴 여성들 일터로 … 일터로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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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인권의 불모지 중동에도 '우먼 파워'의 싹이 움트고 있다. 팔레스타인 의회 다수당이 된 무장세력 하마스는 "새 정부가 여성 권익 보호에 앞장설 것"이라고 약속했다. 자치정부 청사가 있는 라말라에서 7일 전통 의상 차림의 팔레스타인 여성들이 국기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라말라 AP=연합뉴스]

이란 수도 테헤란의 위성도시인 카라즈. 고가 사다리에서 한 소방수가 어린이를 안고 내려왔다. 어머니가 열쇠를 집안에 둔 채 문을 닫는 바람에 집안에 갇혔던 5개월짜리 아이를 구한 것이다. 소방수가 헬멧을 벗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남자들과 똑같은 시험과 훈련을 거쳤습니다. 이 직업을 사랑하고 뿌듯하게 생각합니다."

미담의 주인공인 소방관 라일라(23)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3년 전 카라즈 소방.구조대에 취직한 그는 "차별도, 봐주기도 절대 없다"고 강조했다. 당시 입사한 11명의 여성 소방대원은 남자들과 똑같이 24시간 교대근무를 한다. 헬멧.소방복도 남자와 같은 것을 입고 화재 등 긴급상황 때도 같이 출동한다. 라일라의 동료 여성대원 사라는 "최근 깊은 하수관에 빠진 공사장 인부 두 명을 구하러 갔더니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미는 손을 잡기를 잠시 꺼렸다"고 말했다.

여자는 대통령이나 법관이 될 수 없으며 여권을 발급받으려면 남편이나 아버지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 곳이 이란이다. 세계여성의 날을 하루 앞둔 7일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란은 북한과 더불어 세계 최대 여성 억압 국가 중 하나"라고 말했다. 하지만 라일라와 사라의 경우처럼 변화의 모습은 분명히 있다.

페르시아만 연안국가에선 최근 몇 년간 여성의 사회 진출이 눈부셨다. 미국의 '중동 민주화 구상'에 호응해 이 지역 친미 정권들이 개혁을 했기 때문이다. 오일 머니에 힘입어 대규모 경제개발 사업이 진행되면서 인력 수요가 급증한 이유도 있다.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에서 여성 CEO.매니저를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건설 컨설팅 회사의 매니저인 사하르(27)는 "여성이 없으면 두바이 경제가 흔들린다"고 강조했다. 전통적인 히잡(이슬람 여성의 머리 두건)도 벗어던지고 깔끔한 서양 정장을 입고 남자들과 어울려 일한다.

쿠웨이트 정부는 2005년 여성에게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했으며 첫 여성장관도 배출했다. 모로코와 요르단 등의 의사당에서는 여성 의석수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아직도 여성의 운전을 금지하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여성 창업 붐이 일고 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은 전 세계에서 여성이 가장 고통받는 지역으로 손꼽힌다. 아프가니스탄 여성장관 마수다 잘랄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이 나라와 같은 곳은 없을 것"이라며 8일 눈물 섞인 연설을 했다. 4년 전 이슬람 원리주의 탈레반 정권은 종식됐지만 상황은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다.

지난해에만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300여 명의 여성이 가족에게 살해됐다. 정부가 '16세 이하 결혼금지법'을 만들었지만 지방에서는 예사로 어긴다. 빚을 갚는 수단으로, 그리고 가문 간 불화를 해소하는 방안으로 소녀들을 넘겨주기도 한다. 여성들은 보통 10명의 자식을 낳으며 출산 중 사망도 줄지 않고 있다. 잘랄 장관은 "30분마다 한 명의 어머니가 출산 때문에 사망한다"고 국제사회에 지원을 호소했다.

카이로=서정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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