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 3·1절에 골프치러 내려와 부산 시민들 자존심 상하게 하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3면

한국교원공제회가 주식을 매입한 영남제분의 부산공장 모습. 이 회사 류원기 회장이 3·1절에 이해찬 총리의 골프모임에 참가, 부적절한 로비 의혹을 사고 있다. 부산=송봉근 기자

노무현 대통령의 출생지는 김해지만 정치적 고향은 부산이다. 정치를 시작한 곳이다. 2002년 대선에선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유례없이 30% 가까운 표를 얻은 지역이기도 하다. 2004년 총선에선 열린우리당의 지역구 의원도 한 명 탄생시켰다. 노무현 정부는 지난해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부산에서 개최했다. 지금도 부산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하지만 민심은 아직도 멀리 있다. 부산은 여전히 견고한 한나라당 지역이다. 그런 곳에서 이해찬 총리의 '골프 로비 미수 사건'이 터졌다. 민심은 험악해지고 있다. 기자는 부산을 찾았다.

◆ "부산이 놀이터냐"=8일 만난 개인택시 기사 김모(41)씨는 3.1절 골프 파문을 묻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정권의 총리가 3.1절에 이(여기)까지 내려와 골프 치고, 경제 얘기했다 카는데 경기가 좋아질 기미는 안 보이고, 누가 좋아할 낍니까"라며 "사람들이 한 며칠간은 욕하더만 이제는 그 얘기 꺼내지도 말라 캅니다"고 말을 잘랐다.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 사람이 뭔데 부산에 내려와 이렇게 시끄럽게 하노" "골프는 지(자기) 동네에서나 치지 부산이 지(자기) 놀이터가"라고 했다. 회사원 이모(40)씨는 총리의 처신을 문제 삼았다. "영남제분은 전에 주가조작도 했고, 주식에 조금만 관심 있어도 다 아는 문제있는 기업"이라며 "총리가 골프 문제로 구설에 오른 게 한두 번도 아닌데 꼭 그런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나. 부산에 그런 사람밖에 없는 줄 아느냐"고 흥분했다. 한나라당 소속의 한 시의원은 "지역 경제인들과 총리가 함께 골프를 치며 지역 경제를 논했다면 나쁠 거야 없다. 하지만 하필 3.1절이었다는 것에 부산 시민들의 자존심이 상한 것 같다"고도 했다.

◆ "골프 치면서 이런저런 얘기 왜 안 했겠나"=지역 정.재계에선 골프 모임을 주선한 것으로 알려진 S건설 P회장, 영남제분 류원기 회장과 이 총리의 관계를 곱게 보지 않고 있다. 운수회사를 경영하는 한 기업인은 "류 회장은 공정위 과징금 문제, P회장은 새로 짓고 있는 골프장 문제와 관련해 민원이나 로비가 있었을 것이란 말이 파다하다"고 했다. P회장은 3.1절 골프가 이뤄진 아시아드 골프장 건설에 참여했고 이 골프장의 주주이기도 하다. P회장은 아시아드 골프장의 인수뿐 아니라 현재 건설을 준비 중인 인근 골프장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나라당 부산시당의 한 관계자는 "P회장이 인근 골프장 건설의 실제 주역이란 소문이 있다"며 "그렇다면 총리한테 지나가는 말로라도 이런저런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며 의혹을 제기했다.

특히 류 회장과 이 총리가 어울렸다는 일은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들이다. 한 중소기업인은 "류 회장은 지역내에서 평판이 안 좋은 사람인데 총리가 그런 것도 모르고 함께 다녔나"라며 놀라움을 표했다. 시 공무원 출신인 한 인사는 "결국 노무현 정부 들어 새롭게 떠오른 기업인들과 이 총리가 부절적한 관계를 지속하며 그 기업인들만 배부르게 한 것 아니냐는 곱지 않은 시각이 많다"고 전했다.

◆ "도대체 이 총리에 집착하는 이유가 뭐냐"=지역 사정이 이렇게 돌아가자 열린우리당 부산시당 관계자들은 한숨만 내쉬고 있다. 이대로 가면 5.31 지방선거는 해 볼 것도 없다는 절박한 분위기다. 열린우리당 부산시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안 그래도 한나라당 깃발만 꽂으면 된다는 부산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이제 선거를 어떻게 치르나"라며 "일부 지지자는 당사로 항의전화를 해 오고 있다"고 말했다.

선거를 준비 중인 열린우리당 한 후보자는 "한나라당 최연희 사무총장의 성추행 사건이 터졌을 때만 해도 한번 붙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라며 "노 대통령이 순방 뒤 어떤 결론을 내릴지 모르지만 만일 이 총리를 그대로 둔다면 부산 선거는 해보나마나"라고 걱정했다.

여권 일각에서 일고 있는 '이해찬 구하기' 움직임에 대해서도 강한 불만이 터져나온다. 또 다른 시당 관계자는 "도대체 이 총리가 뭔데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에 이렇게 부담을 주느냐"며 "'이해찬 구하기'에 나섰다는 서울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 하는 사람들이냐"고 비난했다.

골프 모임을 첫 보도한 부산지역 신문의 한 기자는 "이해가 안 간다. 이 총리 골프 회동이 터졌을 때 노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사실은 부산에서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며 "측근들이 나서서 '화를 낸 적이 없다'면서까지 이해찬을 싸고도는 이유를 부산에서는 도저히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가영 기자 <ideal@joongang.co.kr>
사진=송봉근 기자 <bkso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