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농촌 살리기 나선 한국의 '새마을 지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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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농장에서 봄맞이 농사 준비를 하고 있는 정교관씨. 나무 중간에 있는 함석 부착물은 청설모 피해를 막기 위해 정씨가 직접 고안한 장치다. 예산=프리랜서 사진작가 이종탁

중국 랴오닝성을 방문해 현지인들에게 새마을 운동을 전파하고 있는 정교관씨(왼쪽에서 셋째).

대대적인 '농촌 살리기'에 나선 중국이 최근 한국의 '새마을 운동'을 벤치마킹하는 데 열심이다. 2001년부터 중국 농촌의 구석구석을 돌며 '새마을 운동 전도사'로 활약해온 정교관(69) 전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장은 "지난 5년간 뿌린 씨앗이 드디어 결실을 맺는 느낌"이라며 남다른 감회를 밝혔다.

정씨가 중국 대륙에 새마을 운동을 전파하게 된 계기는 중국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1996년 7월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한.중 과학기술경제 교류대회'에서 중국 측이 한국 쪽 참석자들에게 새마을 운동을 전수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2001년 4월 한국의 동북아과학기술협력재단(외교통상부 산하)과 중국 과학기술협회 사이에 정식으로 사업계획이 조인됐다. 재단 측은 국내에서 수많은 새마을 지도자를 양성한 경험이 있는 정씨를 정규 교관으로 초빙했다. 정씨는 임시 교관(농업전문가 1명을 수시로 선발)과 함께 지난해까지 중국 현지에서 31차례에 걸쳐 농민.공무원 등 7700여 명을 교육시켰다.

2002년 중국의 광둥(廣東) 지역에서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이 유행할 때에도 정씨는 농촌을 돌며 교육일정을 마무리지었다. 이에 현지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선 대가 없이는 일을 안 한다는데 당신은 왜 그렇게 열심이냐"는 질문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는 "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많은 지도자들이 무보수로 헌신적으로 일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한 새마을 운동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고 소개했다. 이같은 열성에 감복한 중국 측은 지난해 말로 임기가 끝난 정씨에게 5년 동안 교육을 더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중국 농촌이 잘 살게 되면 우리나라 농촌이 피해를 볼 거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며 "중국의 구매력이 높아지면 국산품 수출에도 도움이 되니 상생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정씨는 평생 농촌 살리기의 외길을 걸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북 전주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서울대 경제학과에 재학 중일 때도 4H클럽과 농업기술자협회에 가입해 농촌 운동을 벌였다. 대학 졸업 후 농협에 취직한 정씨는 80년 12월 새마을운동중앙회가 발족되며 중앙회 산하 기관인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으로 옮겼다. 우수한 새마을 지도자를 양성하는 게 시급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연수원장(84~87년)으로 재직하던 85년 그는 지인의 소개로 충남 예산군 신양면 여래미리의 해발 300m가 넘는 산골 마을에 임야 5만평을 사들여 '다림원'이란 농장을 열었다. 이론가로 남지 않고 직접 농사를 지으며 새마을 운동을 몸으로 실천해보이겠다는 취지에서였다. 주말마다 연수원이 있는 경기도 성남에서 농장까지를 버스로 오가며 유실수를 심고 가꿨다고 한다. 94년 마지막 직장(대한교육보험 전무)을 그만둔 뒤엔 아내와 함께 주민등록까지 농장으로 옮겼다. 2남 2녀를 모두 결혼시킨 정씨 부부는 요즘 농장에서 매실(100그루).호두(150그루).당두충(1만여그루).산도라지.더덕을 키우며 산다. 농번기를 빼곤 일꾼을 쓰지 않고 부부가 농사를 감당한다고 했다.

정씨는 "요즘 농촌에선 자기 논밭에 수해가 나도 관공서에 복구를 부탁하곤 '나 몰라라'하는 농민들이 적지 않아요.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 정신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라며 아쉬워했다.

예산=최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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