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의사소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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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바퀴벌레를 의인화해 의사소통이 단절된 사회의 파멸을 예고하는 '바퀴벌레의 황혼'이라는 실사 합성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다. 1987년 '요시다 히라오키'라는 일본 감독이 만든 것이다. 두 바퀴벌레 사회의 흥망성쇠를 그려냈다.

바퀴벌레 사회 A는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고 술을 즐겨 마시는 독신남자의 안락한 집안에서 번창했다. 그는 바퀴벌레들에 무관심했다. 그 집 주방의 구석에 방치된 음식 찌꺼기를 놓고 바퀴벌레들은 매일 밤 파티를 열었다.

바퀴벌레 사회 B는 독신남자의 앞집에서 형성됐는데 각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호전적 문화가 특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집에 혼자 사는 직업여성은 히스테리컬 결벽증 환자로 바퀴벌레를 향해 끊임없이 살충제를 뿌려댔기 때문이다.

어느 날 두 바퀴벌레 사회의 시민들은 독신남자의 집을 비틀거리며 들어오는 B사회의 한스라는 부상한 바퀴벌레 병사를 맞이하면서 첫 만남을 갖는다. 한스는 파티를 즐기고 있는 A사회의 시민들에게 대량학살이 임박했음을 경고하고 대책을 세울 것을 호소한다.

그러나 A사회의 시민들은 이렇게 풍요롭고 안전한 사회에서 웬 뚱딴지 같은 소리냐며 콧방귀를 뀌었다. 한스의 묵시록적 예언을 믿어준 것은 나오미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암컷 바퀴벌레였다. 며칠 뒤 앞.뒷집에 사는 독신 남녀는 결혼을 했다. 평화로운 A사회의 바퀴벌레들은 새로운 안주인에 의해 전면적인 살충제 공격을 받아 멸망한다.

최후의 생존자인 나오미가 한스와의 관계에서 생긴 수정란 가득한 알주머니를 간직한 채 새 사회 건설을 꿈꾸는 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번역서 '바퀴벌레', 뿌리와 이파리 출간)

요시다 감독은 "내 바퀴벌레 영화는 오늘날 먹는 것과 소유하는 것, 즐거운 시간만 생각하고, 공동체의 위험이나 고통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도 없는 일본의 전후 4세대들을 풍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참가했던 북한 응원단의 김정일 초상화 사건, 조갑제 월간조선 사장과 '국민의 힘'사이에 벌어진 가스총 충돌사건은 같은 한민족이지만 남북.남남 간 의사 소통이 얼마나 단절적인지를 충격적으로 보여줬다. 그런 가운데 한반도 전체의 존망을 가를 북핵 6자회담이 운명처럼 진행되고 있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