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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맥도 지식도 없이 도전, 세월 흘러 유명해지면 그 자체가 영화 아닐까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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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3호 11면

늦깎이 독립영화 제작 동호회 ‘대한독립영화만세’

독립영화라는 공통분모로 모인 동호회 ‘대한독립영화만세’ 회원들. 왼쪽부터 양지선, 조경묵, 이하나, 오현도, 최정한, 손진영, 조유남씨. 김경빈 기자

독립영화라는 공통분모로 모인 동호회 ‘대한독립영화만세’ 회원들. 왼쪽부터 양지선, 조경묵, 이하나, 오현도, 최정한, 손진영, 조유남씨. 김경빈 기자

“스크립트에 ‘R’은 롤을 의미해요. 디지털 카메라에서 첫 번째 메모리 카드면 R1, 두 번째 메모리 카드면 R2로 써요. ‘S’는 신(scene), ‘C’는 한 컷(cut), ‘T’는 테이크(take)를 의미해요.”

직장 관두고 영화계 뛰어든 청춘들 #‘평범한 인맥의 힘’으로 경험 쌓아 #‘델타보이즈’ 주연 배우 이웅빈씨 등 #非전공 영화인 인맥의 장으로

지난 17일 10여 명의 남녀가 서울 서교동의 한 카페에 모였다. 독립영화 관람·제작 동호회 ‘대한독립영화만세’의 회원들이다. 이날은 동호회에서 자체적으로 개설한 촬영반 수업에서 오현도(23)씨가 촬영 현장에서 스크립트 작성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회원들은 실제 촬영 장비를 거리로 들고 나가 1분짜리 실습도 했다.

동호회는 올해 1월 모바일 앱 소모임을 통해 시작됐다. 영화 비(非)전공자들인 평범한 20, 30대가 주축이 돼 일반 극장에서 상영하지 않는 독립영화를 관람하고 궁극적으로 제작도 하는 것이 목표다. 10명도 안 되게 시작한 모임은 1년도 안 돼 250여 명으로 불어났다. 모임장 양지선(31)씨는 “영화계 특성상 인맥이 없으면 힘들더라고요. 없으면 없는 대로 우리끼리 인맥을 만들자고 시작했어요”라고 설명했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양씨는 의류업계에 오랫동안 종사했다. 우연한 계기에 강남의 한 카페에서 상영하는 단편영화를 보게 되면서 매력에 흠뻑 빠졌다. 정교하게 멋을 부린 상업영화와 달리 서투른 연출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지난해 말 불현듯 회사를 그만두고 단편영화를 보러 다니다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운영진 조유남(28·여)씨 역시 뒤늦게 영화감독의 꿈을 꾸고 있다. 그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스펙을 쌓아 첫 직장으로 한 공공기관에 입사했다. 탄탄한 직장이었지만 일하면서 행복하지 않았다. 결국 1년 만에 그만두고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모임에 들어왔다.

생계는 촬영 현장 스태프, 일일 사무 아르바이트 등으로 유지한다. 안정적인 회사를 다닐 때보단 주머니가 가벼워졌지만 흔히 말하는 ‘아픈 청춘’을 떠올렸다면 오산이다. 조유남씨는 “처음에 회사를 관둔다고 했을 때 엄마가 말리셨던 게 가장 마음에 걸렸어요. 그래도 지금처럼 살아 있다고 느끼고, 신나게 무언가에 몰두하는 게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또다른 운영진 조경묵(26)씨는 성우 지망생이다. 틈틈이 공채 시험을 준비하면서 영화 일을 배운다.

올해 8월 연기반 수업을 듣는 회원들의 모습.

올해 8월 연기반 수업을 듣는 회원들의 모습.

동호회 인연은 실제 촬영 현장으로 이어졌다.

동호회 인연은 실제 촬영 현장으로 이어졌다.

최정한씨가 연출한 영화 ‘고시’의 스틸컷. [사진 양지선]

최정한씨가 연출한 영화 ‘고시’의 스틸컷. [사진 양지선]

동호회 안에는 특정 학교 출신도, 이름 있는 영화감독의 ‘라인’도 없다. 오직 평범한 인맥의 힘으로 굴러간다. 이제 발을 디딘 영화감독, 무명의 배우들이 하나둘 모여 재능 품앗이를 한다. ‘시나리오반’ ‘연기반’ ‘촬영반’ 등 자체 수업을 개설해 영화 공부를 하고 촬영 현장에 인력 지원도 나간다.

운동선수 출신으로 독립영화 연출을 하고 있는 최정한(30)씨는 올해만 네 편의 단편 영화를 찍었다. 세 명의 운영진도 그의 촬영 현장에서 스크립터, 타임키퍼 등으로 참여했다. 그 역시 대학 1학년 때 운동을 그만두고 영화 쪽으로 진로를 틀었다. 영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뒤 한국에 돌아와 영화사에 취직했다. 촬영과 사운드 믹싱 등 밑바닥부터 배웠다. 최씨는 “장편영화가 산문이라면 단편은 시예요. 자본에 구애받지 않고 감독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찍을 수 있다는 게 독립영화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연기반’에서 연기를 가르쳐주는 손진영(30)씨는 연극 배우로 활동 중이다.

카메라 작동법과 촬영 기법을 알려주고 있는 오현도씨는 대학에서 영화 전공을 하고 있는 학생이다. 2014년 학교 프로젝트 작품으로 찍은 단편 영화 ‘분실물’이 지난해 한 단편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면서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그가 말했다. “영화계에 아무런 인맥, 지식도 없던 사람들이 세월이 흘러 세계적인 감독이 되거나 영화 현장에서 한몫하는 사람으로 성장해 있으면 이거야말로 한 편의 영화가 아닐까요. 이런 영화 같은 낭만 때문에 이 모임을 좋아해요.”

최근 개봉해 호평이 쏟아진 영화 ‘델타보이즈’ 주연 배우 이웅빈(36)씨, 2012년 다큐멘터리 ‘투올드힙합키드’를 연출한 정대건(31)씨 역시 이 모임의 회원이다.

독립영화는 투자·제작사 등 자본 영향력이 작은 만큼 자유롭게 이야기를 꾸려 간다. 단편·장편, 다큐멘터리 등으로 나뉜다. 독립영화의 평균 제작비는 영화진흥위원회의 올해 지원 액수를 기준으로 단편 974만원, 장편은 1억5818만원 정도다. 상업영화의 평균 제작비는 50억~70억원이다.

독립영화로 필모그래피를 쌓아 상업영화로 넘어가는 것이 관례지만 최근엔 그 자체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가고 있다. ‘용서받지 못한 자’(2005년), ‘똥파리’(2009년), ‘델타보이즈’(2016년) 등 수작들이 꾸준히 나오며 대중적인 인기도 올라갔다. 독립영화관이 생겨나고 멀티플렉스도 전용관이 속속 들어서면서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서울독립영화제 출품을 기준으로 2008년 623건에서 2016년 1039건으로 늘어났다. 영화제 출품을 하지 않는 영화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더 많다.

이렇다 보니 현실이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다. 영화 ‘델타보이즈’가 화제된 이유 중 하나는 250만원의 저예산 제작이었으나 그만큼 배우와 스태프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배우 이웅빈씨는 “독립영화나 저예산 영화일수록 열정페이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아 생활인으로서 고민을 다들 한다. 가끔 불안하기도 하지만 영화 자체가 좋았고 제 선택이었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서 배우 활동을 하다가 2012년 한국에 들어왔다.

주연도 조연도 없는 이 ‘현실 드라마’의 엔딩 장면이 문득 궁금해졌다. 조유남씨가 말했다. “촬영 현장에서 슛 들어가면 일순간 조용~해지거든요. 그때 너무 짜릿하고 행복해요. 가끔 미래가 불안해질 때도 있지만 미래의 문제는 그때의 제가 잘 극복해줄 거라고 믿어요.”


“독립영화, 장르 아닌 자기 이야기하려는 정신”

JTBC ‘전체관람가’에서 공개 될 양익준 감독의 단편영화 ‘라라라’. [사진 JTBC 캡처]

JTBC ‘전체관람가’에서 공개 될 양익준 감독의 단편영화 ‘라라라’. [사진 JTBC 캡처]

영화감독 겸 배우 양익준(42·사진)은 2005년 첫 단편영화를 찍고 4년 만에 강렬한 수작 ‘똥파리’를 선보였다. 독립영화계의 성공 사례로 여겨지는 양 감독은 지난해 4월부터 최근까지 국내외 영화·드라마 다섯 편에 배우로 출연하고 있다. 사이사이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한다. “정신없이 바쁘다”던 그는 ‘독립영화 만드는 청년들에게 조언을 해 달라’는 말에 한달음에 달려왔다. 21일 서울 성북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의 말투는 꾸밈 없이 거칠었다.

JTBC ‘전체관람가’를 통해 오랜만에 단편영화를 찍었다.
“다른 예능 프로그램에 비해 열 배, 스무 배 힘들었다. 출연만 하는 게 아니라 연출, 영화 납품까지 해야 하니 보통 일이 아니더라.‘똥파리’ 때 제작부였던 친구가 이번 단편에서 PD를 했다. 창작도 좋지만 이런 좋은 친구들하고 작업하고 싶어 영화를 만든다. 일할 때 서로 즐겁고 신난다.”
연기와 연출 중 어느 쪽이 더 끌리나.
“늦게 배운 게(연출) 아무래도 끌린다. 연출은 말 그대로 ‘개고생’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재밌다. 좋은 친구들하고 같이 고생하니까 이겨내는 맛도 있다. 혼자 조용한 데서 영감을 채취하는 타입이다. 망상 같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 재밌는 생각들을 기록한다. 그걸 친구들하고 얘기하면서 낄낄거리는 게 좋다. 백날 영화란 어떻고 저떻고 이야기하면 피곤해서 못 산다.”
상업영화와 다른 독립영화만의 매력이 뭔가.
“내 생각에 독립영화는 자기 이야기를 하려는 의지, 하나의 스피릿(정신)이지 어떤 장르가 아니다. 자꾸 멜로, 액션 같은 특별한 장르처럼 본다. 굳이 말하자면 거꾸로 생각하고, 반골 기질이 있고, 부딪쳐야 될 거에 몸으로 부딪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만든 영화도 내 안과 주변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양익준을 따라 하고 싶어 하는 이가 많아졌다.
“경험치가 없을 땐 엉망진창 일단 해보는 거다. 대신 간이든 쓸개든 뭐 하나 태울 각오로 만들어야 한다. 단편영화라고 낙엽 떨어지듯 흘려 버리면 안 된다. 한 작품 한 작품 진심으로 만들고 나에게 확실한 기록이 돼야 한다. 하나 찍을 때마다 돈도 많이 들어가잖아. 국제 단편영화제에 많이 가보는 것도 시야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된다.”
누구나 성공하는 건 아니다. 정말 하고 싶은데 재능이 없으면 어떡하나.
“어려운 문제다. 어릴 때 같으면 ‘한번 더 해 봐’ 했겠지만 지금 제 입장에선 끊는 훈련도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연애랑 비슷하다. 정말 영화가 하고 싶다면 그 안에 감독뿐 아니라 다양한 길이 많이 있다. 어차피 흘러가는 시간이다. 즐겁게 경험했다면 후회만 안 하면 된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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