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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방방곡곡 구멍가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중앙일보·교보문고 선정 '2017 올해의 책 10'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이미경 글·그림
남해의봄날

[에세이] 서울 염리동 충남상회 아저씨는 자전거로 쌀을 배달한다. 강원도 홍천 역전평리에 있는 옥기상회는 안주인 이름을 따왔다. 자주색 양철지붕 당당한 만세상회는 경기도 포천에 있다. 비 내리는 겨울밤 마주한 경북 청송 청송수퍼엔 1980년대의 서글픈 정서가 배어 있다.

이 땅 방방곡곡의 구멍가게 이야기다. ‘그림글’이기도 ‘글그림’이기도 하다. 가만 들여다보자니 저편에 있던 유년의 기억들이 슬금슬금 걸어 나온다. 책장이 쉬 넘어가지 않는다.

푸근한데 불편하다. 쇠락하는 풍경이 흘리는 처연함 때문이다. 일흔 넘은 전남 곡성의 곡성교통죽정정유소는 아흔 넘은 할아버지와 여든 넘은 할머니의 손때가 묻어 반들반들하다. 열여덟 새색시는 점방에서 60년을 보내며 하얗게 늙었다. 그게 10년 전이다. 아직도 그분들은 손님을 기다리고 있을까. 설레는 마음 안고 제주 조천읍에 가니 와흘상회는 그새 문을 닫았다. 작가는 하릴없이 멀구슬나무 아래 앉아 아쉬움을 달랜다.

외환위기로 모두가 위태롭던 시절 작가는 우연히 경기도 광주 퇴촌에 둥지를 틀었다. 세상은 날카로웠지만 시골의 평온과 자연이 방패가 되어주었다. 벚꽃 흩날리던 날 동네 가게에서 문득 보았다. 시간에 따라 오묘하게 빛이 변해가는 적갈색 슬레이트 지붕, 유리창에 무심하게 써 내린 붉은색 ‘음료수’ 글씨, 켜켜이 쌓인 진열대의 물건들…. 아이들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펜을 들었다. 구멍가게 인연의 시작이다. 강산이 두 번 바뀔 동안 천착했다.

펜화에 일필휘지는 없다. 짧고 가는 선이 한 획 두 획 겹쳐지며 더디게 나아간다. 악착같이 매달려야 겨우 끝이 보이는 지독한 그림이다. 나직하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수묵화처럼 담담해 오히려 시리다. 날카로운 펜은 아련한 그림이 되고, 아스라한 글이 됐다. 평상이 단골로 등장한다.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고, 알콩달콩 이야기를 주고받고, 등 대고 누워 별을 보고, 막걸리 몇 잔에 불콰해진 어르신들이 한바탕 대거리도 하는 자리다.

이런 가게들이 문 닫지 않고 대를 이어가는 날이 오지 않을까. 작가의 바람은 소박하지만 대형 마트의 위세는 날로 커지고 골목은 편의점 차지가 됐다. 오늘도 트럭 행상은 시골 구석구석을 훑고 다닌다. 하루 벌이만으로도 나무 돈 통이 묵직해지던 구멍가게의 날들은 이제 어제가 되었다. 그림 속 가게들은 벌써 많이 사라졌다. 살림집이 되고 밥집이 되고 터만 남은 집도 있다.

작가에게 전화했다. 지난달에 화구 챙겨 남쪽을 한 바퀴 돌고 왔단다. 충북 괴산 감물면에서는 100년 다 된 현역가게를 찾았다. 지금은 문 닫은 어느 점방을 그리고 있다. 어제가 될 오늘을, 작가는 쉼없이 꾹꾹 눌러 기록한다.

따스한 방바닥에 배 깔고 아이와 읽으면 좋겠다. 이 그림 좀 볼래? 엄마 아빠 어렸을 적엔 말이지….

안충기 기자·화가 newnew9@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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