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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칫집에 온「압력사절」|신성순<경제부 차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대통령취임 경축특사로 우리나라에 왔던「베이커」미 재무장관은「경축사절」보다「압력사절」(?)의 이미지를 강하게 남겨 놓고 떠났다.
당초에는 바쁜 일정 때문에 15분 정도의 의례적 방문이 될 것이라던 사공일 재무장관과의 회담에서 그는 50분이나 시간을 끌며 원화 절상, 금융 및 증권시장 개방, 그리고 담배·보험 협상의 조기타결 등 한미경제현안문제를 모두 꺼내 놓고 우리측의 성의와 노력을 촉구했다.
외국의 경·조사에 참석하는 국가대표들이 그 기회에 외교적 접촉을 벌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이번 노태우 대통령 취임식 때도 한일 정상회담을 비롯, 미일, 한-미 회담 등 3각 회담이 이루어졌다.
따라서「베이커」장관이 우리나라의 카운터파트와 만나 한미 현안문제를 논의했다고 해서 크게 시비 거리로 삼을 일은 못된다고 할 수도 있다.
또「베이커」장관이 풀어놓은 보따리가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미국 측이 늘 하던 얘기를 되풀이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베이커」장관의 이번 방한활동이 석연치 않은 여운을 남기는 것은 예·의·염·치를 중히 여기는 우리 동양인의 도덕감정과 어딘가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잔칫집에 가서 초청자인 주인을 상대로 시비를 걸거나 논쟁을 벌이는 일을 금기로 여기는 생활 문화 속에 살아왔다.
「베이커」장관의 원화 절상·시장개방요구를 예의에 어긋난 시비라고 말하는 것은 뭣하다 하겠지만 온 국민의 기대 속에 제6공화국이 출범하는 경사스런 잔치에 경축특사로 와서 우리 귀에 거슬리는 얘기들을 하고많은 주문을 하고 갔으니 뒷맛이 개운할 리가 없는 일이다.
「베이커」장관의 지적대로 우리경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그에 상응한 시장개방을 하는 것이 필요함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따지고 보면 시장개방에 장애가 되는 것은 정부정책보다 국민의 인식과 감정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미국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빚 독촉을 하듯 서두르는 미국의 방식에는 동의할 수 없는 것이 솔직한 생각이다.
이번「베이커」장관의 방한은 그런 의미에서도 별로 잘했다는 평가를 받기는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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