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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장병원' 실태 고발한 한의사···면허 포기한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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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연합뉴스]

[사진 연합뉴스]

한 한의사가 어렵사리 딴 한의사 면허를 포기하겠다고 한다. 서른여섯살이라는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한의사가 된 그는 "더는 못하겠다"며 의사 면허를 내려놓겠다고 했다. 그는 의료기관 설립 자격이 없는 사람이 의료인을 고용하거나 의료법인 등의 명의를 빌려 불법 개설한 일명 '사무장병원'을 언론을 통해 고발하고 나섰다. 사무장병원은 병원 개설의 '투자금'을 되찾으려고 환자에게 불필요한 과잉 진료를 유도하거나 각종 불법 행위를 저질러 건강보험 재정을 축내는 주범으로 꼽힌다.

18일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한의사 박현준(41)씨는 "5년간 거쳐온 병원들이 임시직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무장병원이었다"고 말했다.

박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한의사 인터넷 카페 회원 4500명 중 80~90%는 사무장병원에 고용됐거나 설립 제안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직접 병원을 차리면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박씨에 따르면 한의대 졸업에는 6년간 약 1억2000만원이 든다. 한의원 개원에는 최소 3억~5억원이 필요하다. 박씨는 "최소 6개월에서 1년은 적자를 감수해야 하는데 누가 그런 경험 위험을 무릅쓰겠냐"고 말했다.

취업 알선 사이트에 한의사임을 등록하면 사무장병원을 개설하자는 전화가 온다고 한다. 한의원급은 월 1000만~1500만원, 한방병원은 1500만~2000만원 선이라고 박씨는 주장했다. 그는 "보통 고용 한의사 월급이 세후 500만원이니 큰돈이다"라면서 "부산에 있는 한 요양병원에서 최대 3000만원까지 제안받아봤다"고 말했다.

박씨는 차곡차곡 사무장병원들이 불법 의료행위를 한 것들을 수집했다. 2014년 국민권익위원회에 신고도 해봤고 경찰에 고발도 했었다. 그러던 2016년 채용 10일 만에 갑작스러운 통보를 받았다. 해고 사유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업계에서 '블랙리스트' 의사가 됐음을 깨달았다.

결국 지난달 초 요양병원에서 한 달 일하는 것을 끝으로 그는 '한의사'라는 직함을 내려놓기로 결정했다. 박씨는 "1시간에 3~4명 한자만 보는 게 정상이지만 사무장병원에서는 최소 70명 정도 진료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비의료인이 투자한 의료기관에서는 투자금 회수를 위해 부실 진료, 과잉 진료, 건강보험 부당 청구, 보험사기 등을 저지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현행법은 의료면허자나 의료법인·비영리법인 등에게만 의료기관 개설권을 주고 있다. 그러나 박씨의 폭로처럼 비의료인(사무장)이 영리를 목적으로 의사를 고용하고 선량한 시민들을 가짜 환자로 둔갑시켜 보험 범죄에 가담케 하는 사무장병원이 끊이지 않고 있다.

현행법에서 면허증을 빌려준 의료인이거나, 의료인이 아니면서 병원을 개설한 사람은 5년 이하 징역이나 5000만원 이하 벌금형을 받는다. 하지만 벌금이 보험사기로 챙긴 돈보다 낮아 처벌받은 후에도 비슷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사무장병원은 투자방법 및 지분관계가 복잡해 실제 소유자를 밝혀내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박씨는 최근 사무장병원은 사무장과 병원장이 병원설립 자금을 공동 투자하는 합자 방식이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합자 방식 외에도 사무장이 병원장에게 사채를 빌려주고 이자로 투자비용을 회수하는 사무장병원도 있다고 한다.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사무장병원으로 적발된 의료기관은 총 1172곳이다. 이 기간 사무장 병원이 건강보험 재정에서 부당하게 받아 챙긴 돈은 총 1조5318억4000만원에 이른다. 건강보험공단이 부당이득 환수에 나섰지만, 실제로 되찾은 액수는 8%에 불과했다. 사무장병원을 개설하는 방식이 다양해진 만큼 사무장병원을 적발하고 부당이득을 환수하는 방식 역시 달라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채혜선 기자 chae.hyes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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