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report] 미국 ‘망 중립성’ 폐지 … 국내 인터넷업계 우려, 이통사는 반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2면

미국 정부의 망중립성 폐지는 한국에 돌풍이 돼 상륙할까, 아니면 그들만의 얘기에 그칠 것인가. 국내 인터넷 업계에 긴장도가 높아지고 있다.

오픈넷·인터넷기업협회 반발 성명 #“혁신 의지 꺾고 4차 산업혁명 위협” #이동통신 업체들은 내심 논란 즐겨 #망 사용료 오르면 5G 투자에 도움 #해외에 서버 둔 구글·페이스북은 #되레 국내 이통사에게 이용료 받아

한국인터넷기업협회는 17일 긴장감이 잔뜩 묻어나는 입장 자료를 냈다. “망 중립성 폐지가 인터넷 기업의 혁신과 스타트업의 도전 의지를 꺾어 생태계 전반을 위협하게 될 것”, “인터넷을 통한 표현의 자유와 평등권 등 기본적인 가치를 훼손할 가능성이 있다” 등의 주장을 펼쳤다. “4차 산업혁명의 뿌리가 될 망중립성을 오히려 강화해야 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사단법인 한국인터넷기업협회는 2000년에 설립된 비영리 단체로 200여개 인터넷 관련 기업들로 구성돼 있다. 한성숙 네이버 대표가 회장을 맡고 있다.

망중립 유지 여부에 대한 국내 각계 입장

망중립 유지 여부에 대한 국내 각계 입장

사단법인 오픈넷도 자료를 내고 “망중립성 문제는 이용자가 주인이 되는 개방과 자유의 인터넷을 만들 것인지, 통신사가 주인이 되는 통제와 차별의 인터넷으로 만들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노동집약적 성격이 강한 망 사업을 활성화해 경기를 부양시키려는 트럼프의 경기부양 정책을 여과없이 받아들이는 우를 범해선 안된다”는 주장도 덧붙였다.

반면 이통사들은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지만 내심 이번 논란을 반기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한 이통사 관계자는 “통신망을 이용해 거대 기업이 된 플랫폼(구글·페이스북·네이버·카카오 등) 사업자와 갈수록 영업이익이 줄어들고 있는 이통사 간에 적정한 비용 부담을 검토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인터넷 기업들이 망 사용료를 더 냈으면 한다는 얘기다.

국내에서 망중립성 원칙은 2011년 방통위가 정한 뒤 지켜져 오고 있다. 그렇다고 네이버나 카카오가 이통사에 돈을 안 내는 건 아니다. 네이버가 연 700억원대, 카카오가 연 350억원대의 망 사용료를 내고 있다. 네이버·카카오는 자신들의 서버에서 통신망에 접속할 때 접속료 명분으로 통신사에 이용료를 낸다.

네이버 관계자는 “망중립성은 법으로 강제하는 게 아니라 정부가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하면 업계가 자율적으로 따르는 것”이라며 “더구나 이 원칙은 네트워크 상에서 특정 기업이나 데이터를 차별하거나 차단하지 말라는 원칙이지 ‘망 사용료를 걷지 마라’는 내용은 따로 없다”고 설명했다. 사업자간 거래(계약) 상황에 따라 자율적으로 비용을 주고 받고 있다는 얘기다.

미국에서 망중립성이 폐지되고 국내에서도 이런 논의가 진전될 경우 이통사들은 플랫폼 사업자들에게 이들 이용료를 올려달라고 주장할 명분이 생긴다. 이통업계 관계자는 “카카오톡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등장으로 이통사의 문자 메시지 수입이 0(제로)가 됐고, 지금 현재 기술로도 언제든 음성통화를 데이터 통화가 대체할 수 있다”며 “통신사가 수조원이 들어가는 5G·6G 같은 통신망에 재투자할 수 있어야 국내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이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망 사용료 문제는 국내외 인터넷 기업 간 역차별 문제를 재점검하는 계기도 되고 있다. 네이버·카카오와 달리 구글·페이스북은 국내에 망 사용료를 한 푼도 내지 않는다. 네이버·카카오와 달리 서버를 국내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서버에서 인터넷망에 접속하는 대가를 달라고 요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국내에서 페이스북으로 데이터를 주고 받고 글을 업로드하면 해외 통신 서버를 경유해 받게 된다. 예를 들어 SK텔레콤을 사용하는 남자친구가 KT망을 쓰는 여자친구에게 페이스북으로 메시지나 영상을 보낼 경우, SK텔레콤은 해외에 있는 페이스북 서버에 접속해 메시지나 영상 데이터를 받아 온 뒤 KT망에 접속해 보내준다. 이 경우 SK텔레콤은 페이스북의 해외 통신망과 서버에 접속하는 사용료를 오히려 페이스북에 내야 한다. 구글을 이용할 때도 마찬가지다. 네이버나 카카오에서 돈을 받는 이통사들이 오히려 해외 플랫폼사업자들에게는 돈을 내고 있는 것이다. 지난 5월에는 SK브로드밴드가 페이스북 측에 국내에 캐시서버를 설치할 것을 요구하고, 페이스북이 이를 거부하자 국내 사용자의 접속을 차단한 것도 이런 이해관계에서 비롯됐다.

SK텔레콤 관계자는 “유튜브·페이스북 사용자가 늘면서 비용 부담도 늘어나고 있고, 급증한 데이터가 망에 주는 부담도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국내 통신 트래픽 25만테라바이트 가운데 57.6%가 동영상이었다. 시장조사업체 DMC미디어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국내 인터넷 이용자가 모바일 동영상을 볼 때 가장 자주 이용하는 플랫폼은 구글의 유튜브(42.1%)였다. 미국에서 망중립이 폐지돼 인터넷 서비스에 대한 속도 제한이 가능해질 경우, 국내 이통사들도 구글이나 페이스북 서버에 대한 접속료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

이처럼 망중립 문제는 업계의 이해, 미래 산업에 대한 재투자, 국내외 사업자간 차별 등 다양한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정부의 정책 방향도 유동적이다. 방송통신위원회 관계자는 “문재인 정부의 철학도 망 중립성 원칙 유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효성 방통위원장은 최근 사견임을 전제로 “트래픽을 과도하게 유발하는 업체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밝혔다. 법무법인 테크앤로의 구태언 변호사는 “장기적으로 미국의 망중립 폐지는 국내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며 “ICT 산업의 근간이 되는 통신망 재투자와, ICT 혁신이 선순환을 이뤄내도록 본격적인 정책 고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태희 기자 adonis55@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