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무엇이 당면 과제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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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노태우 정권은 역대 어느 정권보다 좋은 조건에서 출범했다. 건국초기의 혼란과 궁핍같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박정희시대 이래 바로 직전 정권까지 줄기차게 도전 받아온 정통성시비로부터도 말끔히 벗어난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국민직선으로 당당히 당선되어 평화적 정권교체를 처음 이룩했다는 헌정사적인 의미 하나만으로도 축복받기에 충분한 터에 노태우 시대가 맞는 내외의 여건도 일찌기 상상할수 없었던 호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우선 전두환 전대통령과 같은「12·12」「5·17」세력이면서도 그세력이 주는 거부감과 역사적 부담으로부터 마치 해방된 사람인 것처럼 등장했다.
그 이유가 직선때문인지, 전두환 전대통령의 강한 개성에 대한 반사이익 때문인지, 아니면 노대통령 고유의 덕성과 나름대로 쌓은 정치적 축적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현재 그에 대한 국민적 인기가 대통령선거때보다 훨씬 올라가 있다는 것이 여론조사 등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안정된 물가와 경제성장, 사상 최초의 흑자경제기조, 성공적 개최가 예상되는 올림픽, 한반도 주변정세의 신 데탕트 추세, 날로 벌어져 가는 남-북한의 국력 차, 상대적으로 쇠퇴일로를 걷고 있는 야당 세 등은 노 대통령의 입지를 더욱 튼튼히 하는 요인들이다.
확실히 노대통령은 시운도 타고난 것 같고, 그자신 선거때부터 지금까지 좋은 처신과 시의 적절한 정책 제시로 예상보다 더 기대를 모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노 정권이 제5공화국의 후속정권이냐, 아니면 새 정권이냐는 시비와 함께 제5공화국의 연장선상에서 비판하는 시각이 여전히 있음에도 이같은 평가를 받는 것은 특이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의 직무수행에 들어간 시점에서 보면 지금까지의 인기는「뜬 공기」 에 불과 할 수 있으며 노 대통령에게 부과된 과제는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무겁고 장래도 결코 순탄할 수만은 없을 것 같은 전망이다.
우선 지금까지 노 대통령의 인기를 뒷받침한 것은 그의 문제 해결능력이나 책임질 수 있는 업적 등 본질적인 것이라기보다 슬로건과 스타일 때문이었다.
업적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인기가 없었던 전전대통령과는 정반대스타일의 문제 접근 방식을 보이고 전대통령 시대에 가장 뚜렷이 문제점으로 부각된 민주화와 지역·계층 간 갈등을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함으로써 박수를 받은 측면을 부인하기 어렵다.
다시 말해 국민들이 노대통령에게 잔뜩 기대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끌고 가려는 방향과 방식이 옳은 것 같으니 일단 지켜보자』는 쪽이지 그 결과와 책임까지 염두에 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내건 민주화와 화합, 권위주의 청산, 문민정치, 보통대통령 등을 국민들에게 실감케 하고 명실상부한 지지를 얻기까지는 넘어야 할 고비가 수없이 많으리란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우선 국민은 곧 전두환 정권에 대한 냉철한 비판과 노 대통령의 새로운 국정운영 스타일보다 노 대통령의 성과와 업적을 주목할 것이다. 그렇지만 「안정 속의 개혁」이란 단기간에 눈에 띄는 성과를 내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안고 있는 숙제가 모두 외형적인 스타일 변화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 시일 내에 국민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많다.
당장 광주사태의 치유가 그렇고, 제5공화국과 어느 점을 단절하고 어느 것을 승 계할 것인가를 구분해 제시하는 것부터가 어렵다.
이미 민화 위가「민주화운동의 일환이었다」고 규정한 광주사태에 대해 노 대통령이 과연 정부차원의 사과를 표명하고 상호 용서와 화합의 매듭을 단 시일 내에 지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민주화나 탈 권위주의·화합처럼 시간을 두고 풀어야 할 숙제를 떠나 노 정권이 당장 부딪쳐 확보해야 할 과제는 13대 총 선이다. 대통령의 국회 해산 권이 없어지고 국회의 국정감사권이 부활된 새 헌법아래에서 원내안정세력의 확보는 체제 유지 상 절대절명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때문에 노 대통령이 취임 후 첫 번째로 취할 대사면 조치와 그후 펼칠 일련의 정책은 총 선을 겨냥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으며 대통령 자신이 선거운동의 최선봉에 나서야 할 형편이다. 향후 5년의 순항 여부가 여기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올림픽을 치르고 선거에서 공약한대로 신임투표를 할 때까지 노 대통령은 끊임없이 새 정권의 참신성을 국민들이 느끼게 하고 각종 약속 이행의 증거를 축적하는 작업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 과정에서 노 정권이 소홀히 할수 없는 것이 물가안정과 부의 균배 문제다. 전 정권에 염증을 느끼고 노 정권의 새로운 슬로건에 기대를 걸었던 사람도 지난 7년간 물가안정과 경제성장 덕분에 불어난 금융자산과 생활의 안정은 계속 지키고 싶어할 것이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이 민정당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느냐는 후계자 문제, 정당정치의 질적 변화와 관련해 민감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정말 정치는 민정당에, 행정은 내각에 맡길 것인지, 파벌정치를 허용해 정당내부의 자유경쟁 풍토를 조성할 수 있을 것인지 등등이 모두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다.
아무든 이런 문제들에 대해 노 대통령은 이제 구체적인 처방을 내리고 평가를 받아야 할 시점에 섰다. 스타일 중심의 이미지 개선은 한계에 도달한 느낌이며 이제부터는 오히려 지나친 기대감을 경계하고 잘못된 것은 고치고 좋은 것은 발전시킨다는 본 질 면에서의 점진적 변화를 보여줄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노 대통령이 아무리 신선 감을 주고 앞장서 권위주의를 청산하려 해도 야당이 바뀌지 않고, 국민들이 구조적인 변혁에 따라 주지 않고, 관료가 변하지 않으면 그 역시 선도 역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밝힌『모두가 함께 걷는 민주주의』와『국민을 일방적으로 끌고 가거나 국민에게 끌려만 다니는 대통령이 되지 않겠다』는 말은 깊은 함축을 던져 준다.
노 대통령 혼자의 변화엔 한계가 있고 외형이 아닌 본질의 변화는 어렵다는 것을 대통령 자신과 국민들이 함께 이해할 수 있다면 제6공화국의 전도가 한결 밝을 것으로 기대된다. <전 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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