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유성운의 역사정치] "성을 쌓고 훈련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영화 '남한산성'

영화 '남한산성'

유성운의 역사정치⑩

“정월, 이호(李淏)가 상주하기를 ‘일본이 근래에 밀서를 보내와 통사할 의사를 비치어 그 사정이 두려우므로 방어하기 위하여 성을 쌓고 훈련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사신을 보내 조사하였더니, 경상도 관찰사 이만, 동래부사 노협이 한결같은 말로 ‘조선과 일본은 평소에 화호(和好)하고 있다’고 했다. 앞서 상주한 것이 사실에 맞지 않아 조서를 내려 이호를 준절히 책망하고, 그 일을 꾸민 신하 이경여ㆍ이경석ㆍ조동 등을 파직시키도록 하였다.” (『청사고(淸史稿)』-「조선열전(朝鮮列傳)」, 순치(順治) 7년 정월)

이호(李淏)는 조선 효종입니다. 1650년 정월, 왕위에 오른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큰 위기를 맞이합니다.
왕자 시절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경험헀던 그는 국방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효종은 재위 원년, 일본의 침입에 대비해 축성(築城)과 군사 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청나라는 조사를 벌여 ‘필요없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에 청의 순치제는 효종을 크게 책망하는 한편, 이를 추진했던 신하들을 모두 파직시키라고 요구합니다.
결국 조정이 중신인 이들이 직위에서 파직되면서 이 사건은 마무리 됐습니다.

영화 '남한산성'

영화 '남한산성'

청나라 역사를 엮은 『청사고(淸史稿)』에 남겨진 이 일화는 조선 효종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북벌론(北伐論)’이 어째서 변변한 성과를 남기지 못하고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국(청)의 허락없이는 방어시설인 성을 쌓는 것도, 군사 훈련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 당시 조선의 현실이었습니다.

명→청, 조선 사신의 위상이 격하된 까닭

조선은 매년 명과 청에 사신을 수 차례씩 보냈습니다.
주목되는 건 명나라 때보다 청나라 때 조선 사신의 위상이 격하됐다는 점입니다. 두 왕조에서 대접하는 의례를 비교해보면 보면 나타납니다.

조선 사신이 북경에 도착하면 중국의 예부상서(현재의 외교부장관)는 하마연(下馬宴)이라는 연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연회의 방식이 다소 차이가 있었습니다.
명나라 때는 사신의 사신 측 입장을 배려해 숙소인 회동관에서 진행됐습니다. 연회는 황제에 대한 예로 회동관의 서쪽 계단 위에 설치된 용정에 일궤삼고두(一跪三叩頭ㆍ한 번 절을 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거행한 후 시작됐습니다.
이것이 청나라 때는 예부(현재의 외교부청사)에서 거행됩니다. 절하는 숫자도 3배가 늘어나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로 바뀝니다.
명나라 때보다 강압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삼전도의 굴욕 [중앙포토]

삼전도의 굴욕 [중앙포토]

중국 황제가 조선의 사신에게 상을 내리는 상사(賞賜)도 마찬가지입니다.
명나라 시기엔 조선 사신이 황제의 조회에 참석하여 상을 받았습니다. 황제의 상을 받은 사신은 이튿날 궁궐로 가서 상을 준 은혜에 감사하는 사은례(謝恩禮)를 거행했습니다.

반면 청나라 시기엔황궁의 문 밖에서 예부 관리가 참석한 가운데 통관을 통해 상을 받았습니다.
사은례도 선물을 받은 직후 그 자리에서 끝냈습니다. 격식이 훨씬 낮춰진 셈입니다.

中 왕조, 위협 사라지면 고압적 돌변

당시 청나라는 왜 명나라보다 조선 사신을 하대했을까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주변의 위협이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명나라 때만 해도 요동(여진), 티벳, 신장ㆍ위구르, 몽골 등 주변 이민족들의 위협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반면 청나라 때는 이들이 모두 체제 안으로 편입되면서 위협이 사라졌습니다.
조선에 대해서도 더욱 ‘고압적’인 사대의 예를 요구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영토비교

명나라와 청나라의 영토비교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고려 우왕 5년(1382년,) 명나라는 국교 수립의 대가로 막대한 세공액을 요구합니다.
매년 금 100근, 은 1만냥, 양마 100필, 세포 1만 필로 고려의 국력을 총동원 해야 겨우 마련할 수준이었습니다.
각종 가뭄과 기근에 허덕이던 고려는 사정이 어렵다는 뜻을 밝히며 금 300냥, 은 1000냥, 공마 450필, 포 4500필을 마련해 보냈지만 명은 적다고 거부했습니다.
결국 고려는 5년 뒤, 금 500근, 은 5만냥, 말 5000필, 포 5만필 등 ‘밀린’ 5년치를 5개월간 분납하는 조건으로 명과의 국교 재개에 겨우 성공합니다.

하지만 3년 뒤 요동을 독자적으로 점령ㆍ지배하고 있던 원나라 장수 나하추가 명나라에 항복하자 상황이 바뀝니다.
나하추 세력은 명나라와 고려 사이에서 일종의 방파제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나하추가 사라지고 5개월 뒤 고려는 명나라로부터 국교 단교를 통보받습니다.
이어 명 태조 주원장은 철령 이북, 즉 지금의 황해도 이북이 본래 원나라의 영토였다면서 이를 다시 되찾아가야 겠다고 통보합니다.

반대로 이런 명나라도 조선의 눈치를 보며 비위를 맞춘 적이 있습니다. 바로 명-청 교체기입니다.
1619년 조선-명 연합군은 청나라(후금) 군대와 싸워 대패합니다. 역사에는 사르후(薩爾滸) 전투라고 기록된 사건입니다.
당시 조선 장수는 강홍립이었습니다. 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남은 병력을 이끌고 후금군에 투항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도 목을 베어야 한다는 등 이에 대한 처벌론이 비등해졌습니다.
역사학자들은 당시 강홍립이 투항한 데에는 ‘무조건 싸우지 말고 형세를 보아 결정하라’고 한 광해군의 밀명에 의한 조치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명청 교체기의 동아시아 [자료 KBS]

명청 교체기의 동아시아 [자료 KBS]

명나라도 당시 강홍립의 투항에 대해 의심을 품었습니다. 그럼에도 애가 탔던 명나라는 조선 달래기에 나섭니다. 조선이 청(후금)으로 기우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조선 사신에게 ‘조선은 열심히 싸웠는데 우리(명)의 장수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위로하는가 하면 황제의 칙서와 은 2만냥을 조선으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항상 조선에 고압적으로 윽박지르던 명이 이렇게 나온 데 대해 조선 측에서도 이례적인 상황으로 받아들입니다.

[유성운의 역사정치]

여기서 문득 궁금해집니다. 외교 혹은 협상의 기술은 무엇일까요.
상대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이 과연 상책일까요.
고려 우왕 때 명나라의 변덕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평화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며 힘을 기반하지 않은 외교는 모래성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4일 오후 베이징 인민대회당 서대청에서 열린 MOU 서명식을 마치고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4일 오후 베이징 인민대회당 서대청에서 열린 MOU 서명식을 마치고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앞서 '서희는 세 치 혀로 거란군을 물리친 걸까(2017년 10월 2일자)'에서도 소개했지만 서희가 '세 치 혀'로 거란군을 돌려 보낼 수 있었던 결정적인 원천은 '힘'이었습니다.
서희는 '협상가'로서 후세에 기억되고 있지만 사실 가장 강력한 주전론자였습니다.
거란의 소손녕 장군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내려왔을 때 고려 조정은 화의론이 대세였지만 서희는 "지금 요구를 들어주면 앞으로도 또 다른 요구를 해올 것”이라며 왕에게 항전을 설득했습니다.
조바심을 느낀 거란은 군사를 둘로 나누어 안융진과 연주성을 공격했지만, 발해 왕족 출신 대도수(大道秀)가 1000여 명의 군사로 결사적인 항전을 펼쳐 이를 막아냈습니다.
주전론을 펼쳤던 서희는 바로 이때 담판에 나섰고, 원하던 바를 이뤄냈습니다. 적의 기세를 꺾어놓은 뒤 협상에 들어간 덕분입니다.

"중원은 우리를 지키지 못하면 천하의 형세가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첫째, 조선의 외교 사절이 처음 해외 각국에 도착하면 반드시 중국 대신의 인도로 외무부에 가야 한다.
둘째 ,연회나 교제가 있을 때는 반드시 중국 대신의 뒤를 따라야 한다.
셋째, 중요하고 큰일을 교섭할 때는 먼저 중국 대신과 비밀히 상의하여 지시를 받을 것이며 아울러 이것은 속방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한다.

조선 고종 24년(1887년) 당시 중국 정계의 실력자 이홍장이 결정한 조선의 대외교섭규정입니다.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는 중국 측 인식은 20세기까지 이어집니다. 20세기 초 중국의 혁명가이자 사상가인 장태염도 1907년 중화민국의 범위를 정하면서 티베트ㆍ몽골ㆍ신강은 제외하되, 베트남과 조선은 영토로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또 비교적 최근에 나온 사설에도 이런 인식은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중국은 그동안 좋은 말로 한국을 타일러 왔는데, 한국이 멋대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면 중국은 상응한 행동을 보여줘야 한다. 중국은 한국에 손봐줄 지렛대가 많아 그 중 하나만 사용해도 짧은 시간 안에 한국을 뒤흔들 수 있다.” (2010년 12월 23일자 중국『환구시보』 사설 中)

중국 지도부의 생각은 여전히 과거의 조공-책봉 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최근 중국의 사드(THAADㆍ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에 대한 보복 조치는 중국이 가진 많은 '지렛대' 중 하나를 사용한 것일지 모릅니다. 실제로 한국 내 일부를 흔들어 놓기도 했습니다.

청말 정계의 실력자였던 이홍장 [중앙포토]

청말 정계의 실력자였던 이홍장 [중앙포토]

우리가 중국을 상대로 자주적 독립국가가 된 것은 그리 오래 전이 아닙니다.
지금으로부터 딱 120년전인 1897년 11월 독립문건립추진위원회는 전 국민 모금운동을 벌여 조선 왕조가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했습니다.
800년 가까이 이어진 조공-책봉 관계를 종식시키고, 중국에 대해 자주적이고 동등한 1대1 관계를 바라던 바람이 담겨 있었습니다.
중국에 대한 종속 관계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독립국가의 꿈은 요원할 것이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1896년의 화두는 ‘독립’이었다. 그해 4월 독립신문 창간, 6월 독립문 건립 결정, 7월 독립문건립추진위원회로 독립협회 창립 등이 이어졌다. [중앙포토]

1896년의 화두는 ‘독립’이었다. 그해 4월 독립신문 창간, 6월 독립문 건립 결정, 7월 독립문건립추진위원회로 독립협회 창립 등이 이어졌다. [중앙포토]

임진왜란 때 고군분투했던 영의정 유성룡은 "중원은 우리를 지키지 못하면 요동이 반드시 먼저 흔들려 천하의 형세가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라며 조선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선조에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명나라는 조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전략적 고려 때문에 파병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판단이었고, 이는 정확히 들어맞았습니다.

400년이 지났지만 중국에 대한 지정학적 중요성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여기에 이해관계를 두고 있는 국가가 중국 뿐이 아니라는 점과 국제 사회에서 자리매김한 한국의 위치입니다.

시진핑 주석의 중국몽(夢)은 한국도 중국도 더이상 조선과 청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중화 질서 회복'이라는 꿈에서 깨어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과거 주변국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중국의 예속을 피했던 고구려, 고려, 광해군 시기의 조선보다 대한민국은 더 많은 옵션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김문식 『조선시대 외교의례의 특징』, 김경록 『조선과 중국(명ㆍ청)의 사행외교』, 안외순 『조선 전기 중화주의와 내치ㆍ외교 관계』, 김영수 『건국의 정치-여말선초, 혁명과 문명 전환』, 전세영 『정치외교적 측면에서 본 明ㆍ淸代 중국의 朝鮮觀 연구- ‘中國正史 朝鮮傳’을 중심으로』를 참고 및 인용해 작성했습니다.

[유성운의 역사정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