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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 개혁의 리더 조광조의 비극을 불러온 지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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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⑦

“봄 3월에 서울(경주)에 지진이 일어나, 백성들의 집이 무너지고 죽은 사람이 100여 명이었다.” (『삼국사기』권 9, 『신라본기』 9, 혜공왕 15년)

“망덕사(望德寺) 탑이 흔들렸다. 높이는 13층이다. 갑자기 심하게 흔들리며 떨어졌다 붙었다 하며 곧 넘어질 듯하기를 며칠 동안 그러하였다.” (『삼국사기』, 권 9, 『신라본기』 9, 경덕왕 14년)

역사 속 한반도는 결코 지진 안전지대가 아닙니다. 특히 영남 지역은 오래전부터 지진다발지역에 속했습니다. 『삼국사기』에서 신라를 다룬 『신라본기』만 해도 48회의 지진 기록이 등장할 정도니까요. 기상청은 혜공왕 15년의 경주 지진의 강도가 8~9에 해당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기상청, 『한반도 역사지진 기록 (2년~1904년)』

계속되는 지진의 여파로 국보 제31호 경주 첨성대의 피해가 우려되는 가운데 지난해 9월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원이 3D 스캐너를 이용해 첨성대의 상태를 정밀 진단하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계속되는 지진의 여파로 국보 제31호 경주 첨성대의 피해가 우려되는 가운데 지난해 9월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원이 3D 스캐너를 이용해 첨성대의 상태를 정밀 진단하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경북은 고대부터 지진다발지역

경주 일대가 지진으로 골치를 앓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황룡사탑입니다. 고려 시대 몽골이 쳐들어왔을 때 아깝게 전소한 바로 그 탑입니다.
신라 선덕여왕이 백제의 기술자 아비지를 초빙해 만든 황룡사 9층 목탑은 황룡사 장육존상, 진평왕의 천사옥대와 함께 신라의 3대 보물로 일컬어졌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황룡사탑은 ‘보물’에서 ‘애물단지’로 바뀌어 갑니다.

“(탑을 세운 지가) 오래되어 동북쪽으로 기울어졌다. 나라에서 쓰러질까 염려하여 고쳐 세우고자 여러 재목을 모은 지 30여년이 되었으나, 아직 고쳐 세우지 못하였다.… 신묘년(871)에 탑이 기울어진 것을 애석하게 여겨…승려와 관인들이 그해 8월 12일 새것으로 만들도록 했다.” (『황룡사구층탑찰주본기』)

하지만 이 같은 노력은 무위로 돌아갑니다.

“(927년)3월에 황룡사탑이 요동하여 북쪽으로 기울었다.” (『삼국사기』권 12, 『신라본기』 12, 경애왕 4년)

지난해 발생한 5.8규모의 지진과 19일 발생한 4.5규모의 여진으로 경북 경주시 첨성대 주변 한옥이 피해를 입었다. 20일 경주시 황남동 한 음식점에서 기와 보수업체 직원들이 건물 지붕의 기와 전체를 교체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지난해 발생한 5.8규모의 지진과 19일 발생한 4.5규모의 여진으로 경북 경주시 첨성대 주변 한옥이 피해를 입었다. 20일 경주시 황남동 한 음식점에서 기와 보수업체 직원들이 건물 지붕의 기와 전체를 교체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심지어 조선 시대에도 지진 때문에 제사를 지낸 첫 기록은 1405년(태종 5년) 경북 경주와 안동 지진 때입니다.
그래서인지 세종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지진(地震)은 천재지변(天災地變) 중의 큰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지진이 없는 해가 없고, 경상도에 더욱 많다.” (『세종실록』권 56, 세종 14년 5월)

한 연구에 따르면 조선 시대(1392~1863년) 일어난 전체 지진 중 경북에서만 94회가 지진이 일어났는데 이는 전국 지진 발생의 20.9%입니다.
경남까지 합치면 이 수치는 32.2%까지 올라갑니다. 한반도 지진은 3회 중 1번꼴로 경상도에서 일어난 셈입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경북 지역을 둘러싼 양산단층과 울산단층 등이 다른 지역에 비해 약하기 때문으로 보고 있지만, 아직 뚜렷하게 밝혀내지는 못했습니다.

조선시대 각 지역별 지진 발생 추이. 경북이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대한지리학회지, '조선시대 이래 한반도 지진발생의 시·공간적 특성'에서 인용.

조선시대 각 지역별 지진 발생 추이. 경북이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대한지리학회지, '조선시대 이래 한반도 지진발생의 시·공간적 특성'에서 인용.

사정 정국의 신호탄, 지진 

한편 조선 시대에 지진은 정계 개편이나 사정 정국의 신호탄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유는 조선 건국의 중심축인 유학자들이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을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각종 자연재해가 일어나는 이유를 음양 조화에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음기와 양기가 엉켜버린 이유를 밝히고,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것은 정치적 행위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각 정치세력은 이를 통해 정국의 주도권을 쥐려고 했고, 이를 둘러싼 갈등도 치열하게 벌어집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선 시대 가장 유명한 숙청이었던 기묘사화입니다.

“초저녁에 발생한 지진 소리가 마치 성난 우렛소리처럼 커서 사람과 말이 모두 피하였다. 놀라 기절한 사람들도 많았다. 담장과 성가퀴가 무너져 떨어졌고, 민가의 쇠붙이로 만든 그릇들이 부딪쳐 요란스런 소리를 냈으며, 도성 안 사람들이 모두 집을 뛰쳐나올 지경이었다. 한성부 관원들이 집에 남아 있는 주민들을 깨워서 붕괴 위험을 알리고, 집 밖으로 나와서 잘 것을 권했다…왕은 ‘막대한 변괴’(莫大之變)에 놀라 즉시 전교를 내려 대신들을 소집했다. 대책을 논의하던 중에 다시 지진이 크게 일어 궁궐이 흔들렸다. 왕이 앉은 용상은 마치 사람의 손으로 밀고 당기는 것처럼 흔들렸다.”  (『중종실록』 권 33, 중종 13년 5월)

 『조선왕조실록』. 왼쪽에 『중종실록』이 놓여있다. [사진제공=문화재청]

『조선왕조실록』. 왼쪽에 『중종실록』이 놓여있다. [사진제공=문화재청]

[유성운의 역사정치]

지진에 발목이 잡힌 조광조 

1518년(중종 13년)의 대지진은 당시 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던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건곤일척 대결로 비화합니다.
당시 사림파의 리더였던 조광조는 왕(중종)에게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것은, 음(陰)이 성하는 조짐"이라며 "지진으로 인한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소인(공신)들을 멀리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공신들의 작위 삭탈 및 재산 귀속, 현량과 실시 등 급진적인 개혁 드라이브를 요구했습니다.
중종이 민심 수습을 위해 조광조의 손을 들어주면서 정국은 사림파가 장악합니다. 주요 대신 인사까지 사림파의 뜻대로 기용됐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조광조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조광조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지진은 또 일어났고, 우박과 수해까지 이어졌습니다.
이쯤 되면 중종으로서는 ‘누가 소인이지?’라는 의문을 가졌을 법합니다. 또한 반정(反政)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입장에서는 반정공신들을 부정하는 조광조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유명한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으로 조광조 세력은 오히려 위기에 빠집니다.

정암 조광조 적려 유허비. 전남 화순 능주 조광조 유배지의 영정. [중앙포토]

정암 조광조 적려 유허비. 전남 화순 능주 조광조 유배지의 영정. [중앙포토]

이 틈을 노린 훈구파는 1518년의 대지진은 조광조 세력이 하늘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이라며 역공을 취했고, 결국 사림파가 대거 숙청되는 기묘사화로 이어집니다. 중종은 몇 년이 지나서도 1518년의 지진은 ‘기묘사림의 변란’(己卯士林之變)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라고 말하며 조광조를 재차 비판할 정도로 부정적 인식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조광조가 성급했다고 비판하는데, 지진을 기회로 삼아 사회적 동의가 충분치 않았던 개혁을 밀어붙인 급진성을 지적한 것입니다.

기상청장에 올라 권력을 잡은 수양대군
한편 조선에서 지진을 정치적 정국 개편의 신호탄으로 활용했던 최초의 사례는 태종입니다.
왕권 강화를 위해 주요 외척세력인 자신의 처남 민무구ㆍ민무질 형제를 제거할 때 지진을 꺼내 들었습니다. 1408년(태종 8년) 서울에서 지진이 일어났을 때, 태종은 사간원에서 민 씨 형제의 부덕함을 지적한 상소를 들어 이들을 제주도로 귀양보냈고 이듬해 지진이 발생했을 때는 자결을 명령했습니다.

영화 '관상'의 수양대군(이정재).수양대군은 관상, 풍수 등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다고 한다.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대군은 지금의 기상청장인 서운관사를 맡았다.

영화 '관상'의 수양대군(이정재).수양대군은 관상, 풍수 등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다고 한다.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대군은 지금의 기상청장인 서운관사를 맡았다.

천인감응설에 민감했던 수양대군은 정변을 일으킨 뒤 아예 기상청장에 취임하기도 했습니다.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장악한 그는 의정부사(議政府事)ㆍ경연서운관사(經筵書雲觀事)ㆍ판이병조사(判吏兵曹事)라는 각종 직책을 맡습니다. 여기서 서운관(書雲觀)이 바로 천문과 날씨를 담당하는 관청입니다.
이는 정변 후 천재지변이 일어날 경우를 대비한 포석으로 해석되는데, 실제로 계유정난 이듬해인 1454년(단종 2년) 경상도와 전라도에 대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수양대군은 몇 달 후 단종을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며 정변을 마무리 짓습니다.

조선시대 경북의 지진활동. 대한지리학회지, '조선시대 이래 한반도 지진발생의 시·공간적 특성'에서 인용.

조선시대 경북의 지진활동. 대한지리학회지, '조선시대 이래 한반도 지진발생의 시·공간적 특성'에서 인용.

조선의 천인감응설은 단순히 미신적 행위라기보다는 정치권의 각성과 조속한 민심 수습을 요구하는 정치테제로써 작용했습니다.
지진이 발생하면 관료들은 해당 지역의 세금과 부역을 낮추고, 사치를 줄이며 재정을 절약하라고 제언했습니다. 천인감응설을 처음 내걸었던 중국의 유학자 동중서도 “국왕이 덕을 닦으면 전화위복을 이룰 수 있으며, 재앙이 덕을 이기지 못한다(災不勝德)”고 설명했습니다.

즉, 지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났을 때 적절한 후속 조치를 통해 민심을 수습하고, 공동체를 하나로 단결시키는 것이 지도자의 덕목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천재지변은 아니나 박근혜 정부 당시 일어났던 세월호 참사는 사고 자체보다는 이후 정부의 수습 방식과 자세 때문에 더 논란이 됐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 대목입니다.

2011년 8월 27일(현지시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D.C 소재 연방재난관리청(FEMA) 본부에서 초대형 허리케인 `아이린(Irene)'의 상황을 보고받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전날 저녁 여름휴가를 중단하고 백악관으로 복귀했다.[연합뉴스]

2011년 8월 27일(현지시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D.C 소재 연방재난관리청(FEMA) 본부에서 초대형 허리케인 `아이린(Irene)'의 상황을 보고받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전날 저녁 여름휴가를 중단하고 백악관으로 복귀했다.[연합뉴스]

반면 지난 2012년 허리케인 샌디로 뉴욕과 뉴저지주가 쑥대밭이 됐을 때 오바마 전 대통령은 재난 컨트롤타워인 연방 재난관리청(FEMA)에서 회의를 주도하고 복구현장을 찾는 등 빠르고 효율적으로 대처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재난 전보다 지지율이 뛰어오르기도 했습니다. 그가 천인감응설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해도만큼은 높았던 셈입니다.

※ 위 기사는 윤용출 『조선전기 지진 현상의 이해와 대응』, 윤순옥ㆍ전재범ㆍ황상일 『조선시대 이래 한반도 지진발생의 시ㆍ공간적 특성』, 허인욱, 『‘三國遺事’ 皇龍寺九層塔條의 編年검토』, 기상청 『한반도 역사지진 기록 (2년~1904년)』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중 『중종실록』인용은 윤용출 『조선전기 지진 현상의 이해와 대응』에 수록된 내용을 재인용했습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유성운의 역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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