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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 YS 키즈와 정조 키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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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②

김조순, 남공철, 심상규, 이만수, 서영보.
이 다섯 명은 순조 시대에 정계를 움직인 핵심 인물들이었습니다. 감히 견제하기 어려운 그들의 권력에 빗대 ‘천생오태사(天生 五太史)’라고 불렸습니다. 비주류였던 노론 시파와 소론 출신의 신진세력이었는데 정조의 신임을 듬뿍 받아 성장했습니다.

흔히 사극이나 소설에서 노론은 정조와 대척점에 선 정치적 반대세력으로 등장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이분법적인 구도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노론이라고 해서 모두 정조와 척을 진 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노론계는 시파(時派)와 벽파(僻派)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주류 세력인 벽파는 성리학적 세계관을 고수하려 하고 다른 사상을 백안시했습니다. 또,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와 갈등관계였고, 그런 대립 속에 사도세자가 사망하자 그의 자식인 정조를 매우 경계했습니다.

반면 주로 서울 출신인 시파는 보다 온건한 입장이었습니다. 기존의 보수적 시각에서 탈피해 청나라의 선진문물 수용이나 상공업 진흥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죽은 사도세자에 대해 온정적이었습니다.
정조는 이런 노론 시파와 소론의 동량지재들을 발탁해 자신의 측근 세력으로 양성했습니다.

요순 시대를 이상으로 삼았던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 사진은 정조 표준 영정이다. [사진 판미동]

요순 시대를 이상으로 삼았던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 사진은 정조 표준 영정이다. [사진 판미동]

정조가 죽고(1800년) 순조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벽파가 세력을 잡았지만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벽파의 세상은 순조(1800~1834년) 집권기 중 6년에 그쳤습니다.
1806년 병인경화(丙寅更化)로 벽파 세력이 제거되자 정조와 협력했던 노론 시파와 소론이 재부상했습니다. 이때 전면에 나선 것이 바로 ‘정조 키즈’였던 천생오태사였습니다.

정조대왕 능행차. [중앙포토]

정조대왕 능행차. [중앙포토]

천생오태사의 등장과 좌절 

시간은 기대와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서얼 등용을 통한 인재 활용, 금난전권 폐지 등의 상공업 발전, 서학(西學)에 대한 온건한 대응 등 정조 시대를 규정짓는 개혁 어젠다들은 복원되지 않았습니다. 정조가 죽기 전까지 심혈을 기울였던 수원 화성 천도도 다시는 재개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쇠락에 결정타가 된 세도정치도 바로 천생오태사에서 나왔습니다.
정조가 유난히 아껴 정조 이후 시대를 관리해달라고 부탁받았던 김조순은 안동김씨 세상을 만든 세도정치의 출발점이 됐습니다. 얼마 후 홍경래의 난(1811년)을 시작으로 민란들이 전국 각지에 들불처럼 번졌습니다.

순조 시대의 정권 실세가 ‘정조 키즈’였다는 것은 얼마 전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숨은 퍼즐조각입니다.
그동안 정조와 순조의 시대가 너무나 달랐기에 그동안에는 두 시기의 ‘단절성’에만 관심이 모였습니다. 여기엔 정조 시대에 대해 긍정 일색이었던 분위기도 작용했습니다.

정조와 당파의 협력 관계

정조와 당파의 협력 관계

최근 학계에서는 ‘정조 키즈’들이 왜 수구화 됐는지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여러 주장이 나오고 있지만 애초에 양측이 바라보는 목표가 서로 달랐다는 점에는 대개 동의합니다. 즉, 정조는 절대적 왕권 강화를, 노론 시파와 소론은 권력 획득을 바라봤기 때문에, 양측의 동상이몽이 가진 한계였다는 것입니다.

노론 시파의 영수이자 세도정치를 확립한 김조순의 초상화 [사진 위키백과]

노론 시파의 영수이자 세도정치를 확립한 김조순의 초상화 [사진 위키백과]

[유성운의 역사정치]

YS키즈의 등장 

'정조 키즈'들이 정조의 유산을 종식시킨 역사의 아이러니가 떠오른 것은 지난 31일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의 발언 때문입니다.
홍 대표는 지난 31일 ”우리(자유한국당)가 왜 호남에서 홀대 받아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5ㆍ18의 주범인 전두환ㆍ노태우 전 대통령을 처단한 것도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아닌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신한국당”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5ㆍ18특별법을 만들고 5ㆍ18을 민주화운동이었다고 규정했다. 망월동 국립묘지 성역화한 것도 DJ가 아니라 YS 때 신한국당”이라며 “이런 것들을 호남에 알리고 우리를 더 이상 핍박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호소하고 올 생각”이라고 강조했습니다.

2011년 7월 6일 동작구 상도동 김영삼(오른쪽) 전 대통령 자택을 방문한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가 김영삼 전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2011년 7월 6일 동작구 상도동 김영삼(오른쪽) 전 대통령 자택을 방문한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가 김영삼 전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홍 대표는 김 전 대통령을 통해 정계에 입문한 ‘YS 키즈’입니다.
김 전 대통령은 1996년 총선에서 대거 신진세력을 영입했습니다.
노동운동가 출신의 김문수ㆍ이재오, 학계의 개혁ㆍ소장파로 통했던 손학규, 92년 대선에 신정당 후보로 출마했던 박찬종 등을 영입했습니다. 덕분에 민정ㆍ민주ㆍ공화 3당이 합쳐지며 보수색이 강했던 신한국당은 '개혁'이라는 외피를 두를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선거가 될 것으로 예상됐던 총선에서 여당은 야당의 아성으로 불리던 서울 등 수도권에서 선전하며 승리를 거뒀습니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실제 모델로 유명해진 법조인 홍준표도 바로 이때 영입됐습니다.

지난 1996년, 노태우,전두환 전대통령,(앞줄) 차규헌,황영시(뒷줄)가 12.12 사태 등과 관련한 1심 판결선고를 앞두고 피고인석에 서있다. [중앙포토]

지난 1996년, 노태우,전두환 전대통령,(앞줄) 차규헌,황영시(뒷줄)가 12.12 사태 등과 관련한 1심 판결선고를 앞두고 피고인석에 서있다. [중앙포토]

하지만 정치권 전문가들은 ‘YS 키즈’인 홍 대표가 이끄는 한국당과 김 전 대통령이 이끌던 신한국당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고 봅니다.
엄태석 서원대 행정학과 교수는 “YS는 하나회 숙청, 금융실명제, 전두환ㆍ노태우 두 전임 대통령에 대한 재판, 5ㆍ18 특별법 등을 처리한 건 물론이고 노동계와 재야 세력을 대거 수혈했다”며 “이처럼 시대적 변화에 발맞추기 위한 보수 개혁을 줄기차게 시도해 야당을 긴장시켰다”고 평가했습니다.
이어 “그에 비해 지금은 당시보다 지형이 더 진보적으로 바뀌고 있는데 제자리만 지키고 있다. ‘YS 코스프레’를 하지만 당시 영입된 YS키즈 중에 이를 이행하는 정치인은 거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금융실명제 소식을 보도한 주요 신문 지면 [중앙포토]

금융실명제 소식을 보도한 주요 신문 지면 [중앙포토]

한국당은 현재 수도권과 젊은 세대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받고 있습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한국당의 지지율은 서울ㆍ수도권에서 지지율이 한 자릿수입니다. 20~30대에서는 원내 5당 중 최하위 수준입니다.
수도권의 한 의원은 “만약 홍 대표의 자리에 YS가 있었다면 대선에서 박 전 대통령의 탄핵에 대해 감싸는 듯한 발언을 했을까, 지금처럼 오로지 50대 이상 장년층과 강경 우파만 바라보는 정치를 했을까”라고 반문했습니다.
YS키즈들이 지금 정계에 입문한다면 어느 당으로 발길을 향할까요.
어쩌면 호남에서 ‘핍박’받는 이유와 해답도 홍 대표 자신은 이미 잘 알고 있지는 않을까요?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유성운의 역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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