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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 1등 못하니까 괜찮다?…공로에 보답하지 못하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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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⑪

영화 '명량' [중앙포토]

영화 '명량' [중앙포토]

“임진년 서행(西行)할 당시에 호종했던 사람들에게 녹훈할 것을 전교하였는데 이제 왜적도 몰아내고 명나라 군대도 철수하였으니 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장사(將士)도 비록 적을 초멸(勦滅)하지는 못하였지만 그중에는 힘껏 싸워 공을 세운 사람도 있을 것이니, 역시 자세히 살펴서 함께 녹훈하도록 하라.” (『선조실록』34년 3월 10일)

1601년. 임진왜란이 종결된 지 3년 만에 공신에 대한 조사가 시작됩니다.
7년간의 전쟁에는 이순신·김시민 등의 관군뿐 아니라 고경명·조헌 등이 이끌던 의병, 사명당·서산대사 등의 승병, 심지어 적장을 껴안고 촉석루에서 뛰어든 논개 같은 기생까지 참으로 다양한 계층이 나섰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고군분투하며 희생했던 이들에게 격려와 위로로 이어졌어야 할 행사였지만 시작부터 미묘한 분위기로 흘러갑니다.
조사를 명령한 선조의 발언부터 무언가 마뜩치 않은 분위기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나라 장사(將士)도 비록 적을 초멸(勦滅)하지는 못하였지만, 그중에는 힘껏 싸워 공을 세운 사람도 있을 것이니…”

눈여겨볼 지점은 또 있습니다. 발언 순서입니다. 임진년 서행(西行)에 호종했던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먼저 나옵니다. 서행은 한양을 버리고 명나라로 향했던 피난길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선조의 발언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었을까요.

문신 유성룡이 임진왜란 동안 경험한 내용을 기록한 징비록. [사진=문화유산국민신탁]

문신 유성룡이 임진왜란 동안 경험한 내용을 기록한 징비록. [사진=문화유산국민신탁]

“왜란을 평정한 것은 중국 군대의 힘이었다"

선조의 지시에 따라 공신도감이 만들어졌고 선별 작업은 선조 37년 10월에 마무리됩니다. 약 3년 7개월이 걸린 셈입니다. 『선조실록』 37년 6월 25일 기록에 따르면 공신은 3개 그룹이었습니다.

 ①호성공신(扈聖功臣): 의주까지 시종(始終)하고 거가(車駕)를 따른 사람들
 ②선무공신(宣武功臣): 왜적을 친 제장(諸將)과 군사와 양곡을 주청(奏請)한 사신(使臣)들
 ③청난공신(淸難功臣): 이몽학(李夢鶴)을 토벌하여 평정한 사람

호성공신은 선조의 피난길에 함께한 신하들이고 선무공신은 주로 왜적과 맞서 싸운 장수들입니다. 청난공신은 임진왜란 중 벌어진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신하들로 큰 의미는 없었습니다.

임진왜란 중 일어난 이몽학의 난을 다룬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중앙포토]

임진왜란 중 일어난 이몽학의 난을 다룬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중앙포토]

문제는 선무공신이었습니다. 선조는 자신과 의주까지 피난을 갔던 신하들에 대해서는 관대했지만, 왜적과 싸운 무장들의 공적에 대해 평가하는 데는 부정적이었습니다.
선조 36년 4월 공신도감에서 이순신, 권율, 원균, 김시민, 곽재우 등 26인의 무장을 선무공신으로 추천했지만 선조는 이순신, 원균, 권율, 고언백 등 4인 외엔 인정하기 어렵다며 거부했습니다. 결국 14인의 무장만 선무공신으로 선정되는 절충안이 마련됐습니다.
이 명단에는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며 일본군에 맞서다 전사한 동래부사 송상현이나 '홍의장군'으로 불린 의병장 곽재우 등 우리에게 익숙한 많은 장수들이 빠졌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제1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동래부사 송상현을 다룬 '동래부사순절도'(보물 제392호) [중앙포토]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제1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동래부사 송상현을 다룬 '동래부사순절도'(보물 제392호) [중앙포토]

반면 선조와 피난을 갔던 호종공신에는 86명이 선정됐습니다. 14명의 무장보다 약 6배가 많은 수치입니다. 이 중에는 내시와 이마(理馬ㆍ임금의 말 관리사) 30명도 포함돼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어느 정도는 예견된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공신 조사를 지시하고 나흘 뒤 선조는 이렇게 ‘가이드라인’을 내밀었습니다.

“이번 왜란의 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명나라 군대의 힘이었고 우리나라 장사(將士)는 명나라 군대의 뒤를 따르거나 혹은 요행히 잔적(殘賊)의 머리를 얻었을 뿐으로 일찍이 제힘으로는 한 명의 적병을 베거나 하나의 적진을 함락하지 못하였다.”  (『선조실록』34년 3월 14일)

조선왕조실록[문화재청]

조선왕조실록[문화재청]

[유성운의 역사정치]

임진왜란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던 임금

주변의 우려에도 선조는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선조가 선무공신보다 호성공신을 우대한 데에는 나름의 정치적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선조와 신하들이 나눈 대화를 따라가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①『선조실록』 35년 7월 23일

“전장에서 뛰어나게 힘을 발휘한 자들에 대해서는 상께서 이미 통촉하고 계실 테니 몇 명 정도 뽑아내 융통성 있게 마련한다면… 정왜(선무)공신이 호종공신에 비해 지나치게 적으면 뒷날 장사(將士)들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염려됩니다.”(비변사)

“힘껏 싸운 장사(將士)들에 대해서는 그 공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겠으나 우리나라 장졸에 있어서는 실제로 적을 물리친 공로가 없다.” (선조)  

'제21회 동래읍성역사축제'가 한창인 2015년 10월 11일 부산 동래구 동래읍성에서 배우들이 임진왜란 당시 첫 전투지 였던 동래읍성 전투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올해로 21회째를 맞는 동래읍성역사축제는 2014~2015년 문화체육관광부의 '대한민국 유망축제',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으로 선정된 바 있다. [중앙포토]

'제21회 동래읍성역사축제'가 한창인 2015년 10월 11일 부산 동래구 동래읍성에서 배우들이 임진왜란 당시 첫 전투지 였던 동래읍성 전투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올해로 21회째를 맞는 동래읍성역사축제는 2014~2015년 문화체육관광부의 '대한민국 유망축제',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으로 선정된 바 있다. [중앙포토]

② 『선조실록』 37년 6월 21일

“싸움터에서 자신을 잊은 채 힘써 싸운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도 이순신ㆍ원균 이외에는 고언백 1명만 넣었을 뿐이고 그 이외는 현저하게 녹훈할 만한 공이 있는데도 모두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녹훈한다면서 이처럼 매몰스럽게 했으니, 어떻게 전사(戰士)들의 마음을 격려 권면하여 분발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항복, 유영경, 기하헌 등)

“(선정된) 이외의 장사(將士)들은 진실로 적을 무찌르면서 역전(力戰)한 공이 없다. 설혹 성(城)을 지킨 노고와 어느 한 곳에서 역전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옛 사례와 비교해보면 단서철권(丹書鐵券ㆍ공신들에게 수여하던 상훈 문서와 쇠로 만든 표지)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선조)  

2011년 6월 1일 대구시 동구 효목동 망우당공원 내 임란호국 영남충의단에서 ‘제1회 의병의 날 기념식’이 열려 향사를 마친 영남의병 후손들이 선조의 위패를 둘러보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홍의장군 곽재우 장군이 처음 의병을 일으킨 1592년 4월 22일(음력)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6월 1일을 의병기념일로 지정해 기념하게 됐다. 곽재우 장군ㆍ김면 선생 등 영남의병 315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 프리랜서 공정식 ]

2011년 6월 1일 대구시 동구 효목동 망우당공원 내 임란호국 영남충의단에서 ‘제1회 의병의 날 기념식’이 열려 향사를 마친 영남의병 후손들이 선조의 위패를 둘러보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홍의장군 곽재우 장군이 처음 의병을 일으킨 1592년 4월 22일(음력)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6월 1일을 의병기념일로 지정해 기념하게 됐다. 곽재우 장군ㆍ김면 선생 등 영남의병 315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 프리랜서 공정식 ]

선조의 속내는 다음 발언에서 보다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이번 적변(賊變ㆍ임진왜란을 가리킴)은 전에 없던 변고로서 변변찮은 나로 말미암은 소치다. 그런데 명나라 조정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적을 몰아내고 강토를 회복했으니 이 또한 옛날에 없던 공적이다. ”(『선조실록』 35년 7월 23일)

“명나라 군대가 나오게 된 연유를 논하자면 여러 신하들이 어려운 길에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따라 의주까지 가서 명나라 조정에 호소했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왜적을 토벌하고 강토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 (『선조실록』34년 3월 14일) 

영화 '명량' [중앙포토]

영화 '명량' [중앙포토]

비록 변변히 맞서지도 못하고 의주로 도망갔지만, 명나라 군대를 데려와 전쟁을 끝냈으니 "옛날에 없던 공적"을 세웠다는 자화자찬입니다. 이를 위해 ‘재조지은(再造之恩ㆍ나라를 다시 만들어 준 은혜)’이라는 정치적 어젠다를 발전시키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조선 측 관군과 의병들의 활약을 한사코 깎아내린데는 선조 자신을 임진왜란의 주연(主演)으로 띄우려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실망하고 위협을 느낀 곽재우 같은 의병장은 아예 산속으로 은거해버립니다. 그리고 대신들의 경고와 우려는 현실이 됐습니다.
한 세대가 지난 뒤 일어난 정묘·병자호란에서는 이전 같은 의병들의 활약상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선수들의 땀 대신 정치 논리로 얼룩진 올림픽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을 두고 정치적 목적 때문에 운동선수들을 희생시키려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던 정부가 수 년간 땀 흘린 선수단을 배제한 데 대해 실망했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습니다.

한국이 여자 아이스하키팀을 참가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의대생, 피아노 전공자 등 다양한 경력을 지닌 선수들이 본업을 놓고 스폰서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버텨준 덕분입니다. 하지만 이제 정치적 논리에 따라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됐습니다.
설령 남북 단일팀이 성공한다고 해도 스포트라이트는 선수와 감독이 아니라 이를 공동연출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에게 쏟아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충북 진천 국가대표 선수촌을 방문해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단 격려를 하고 있다. 2018.01.17. 청와대 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충북 진천 국가대표 선수촌을 방문해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단 격려를 하고 있다. 2018.01.17. 청와대 사진기자단

특히 국민들의 공분을 키운 것은 이낙연 국무총리의 발언입니다.
이 총리는 지난 16일 기자 간담회에서 “여자 아이스하키는 우리가 세계랭킹 22위, 북한이 25위로 메달권 밖”이라며 “우리 선수들도 (북한 선수 추가에) 큰 피해의식이 있지 않다”고 밝혔습니다.
여자아이스하키 대표팀 박채린(20) 선수의 어머니 이은영(50)씨는 “어차피 1등을 못하는 선수들이니까 북한 선수들하고 같이 뛰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정치적인 쇼나 하라는 말인지도 모르겠다”며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지난해 2월 삿포로 겨울 아시안게임에서 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격파한 뒤 어깨동무를 하고 애국가를 부르는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 한 선수는 애국가를 부르며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흘렸다. [비디오머그 캡처]

지난해 2월 삿포로 겨울 아시안게임에서 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격파한 뒤 어깨동무를 하고 애국가를 부르는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 한 선수는 애국가를 부르며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흘렸다. [비디오머그 캡처]

400년 전 선조는 ‘재조지은’이라는 정치적 담론을 위해 전장에서 고군분투했던 조선군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장사(將士)들이 왜적을 막는 것은 양(羊)을 몰아다가 호랑이와 싸우는 것과 같았다. 간혹 그 가운데에 잘하였다고 하는 자도 겨우 한 성을 지킨 것에 불과할 뿐이다.”

묵묵히 받아적던 사관은 자신의 군대를 깎아내리는 임금의 강변 뒤에 이렇게 남겼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공로에 보답하는 것은 국가의 막중한 행사이다. 막중한 행사인데도 사람들에게 가볍게 시행하였으니 어찌 매우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정왜(征倭ㆍ왜군 토벌)가 비록 중국 장사(將士)들의 공이라고는 하나, (조선 장사들도) 맞서 싸워 승전한 공이 없지 않았다. 싸움에 임한 장사들을 소략하게 하였으니, 공에 보답하는 방도를 잃었다고 할 만하다.”  (『선조실록』36년 2월 12일)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노영구『공신선정과 전쟁평가를 통한 임진왜란 기억의 형성』, 임기영『「宣武原從功臣錄券」에 관한 書誌的 연구』, 김강식 『조선후기의 임진왜란 기억과 의미』를 참고해 직성했습니다.

[유성운의 역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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