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비상사태 해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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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포고령 선포 이후 150여 명이 쿠데타 관련 혐의로 기소되거나 현재 조사를 받고 있고, 야권의 정부 비판도 거세지고 있어 정국이 안정되기까지에는 다소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아로요 대통령은 이날 전국에 방영된 TV 연설을 통해 "정부를 전복하려는 쿠데타 세력이 분쇄됐다는 확신이 들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부터 국가비상사태를 해제한다"고 밝혔다. 필리핀 언론들은 이날 조치가 쿠데타 위협이 사라졌다는 대통령 안보보좌관들의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아로요 대통령은 야당에 대해 정부가 지금까지 이룩한 성과를 파괴하려는 어떤 음모도 중지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아직도 반정부 세력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의식한 발언이다.

실제로 현 정부에 대한 반발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 일주일 동안 필리핀 경찰은 전국에서 군과 경찰.야권에서 150여 명을 쿠데타 연루 혐의로 체포, 이 중 50명을 기소했다. 나머지 100여 명은 현재 경찰이 조사 중이어서 기소자는 더 늘 전망이다. 기소자 중에는 좌파성향 의원 7명을 비롯해 야권 정치인사 16명이 포함돼 있다. 좌파 의원들은 현재 경찰의 조사에 응하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 경찰 수뇌부 출신인 라몬 몬타노는 2일 "군부의 쿠데타 기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군내 극우세력과 공산주의자들이 공모했다는 정부 주장은 억측"이라고 비난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딸 이미 마르코스 의원도 1일 기자회견에서 "아로요 대통령이 마르코스의 계엄령을 모방해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고 비난했다.

일부 반정부 군부 세력도 관망 중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특히 지난달 26일 레나토 미란다 해병대 사령관이 쿠데타 음모 연루 의혹으로 해임된 뒤, 아리엘 퀘루빈 대령 등 그의 일부 지지세력의 반발은 일단 수습됐으나 따르는 군인들이 많아 언제 또 다른 쿠데타가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다. 또 2일에는 해병대와 육군 제1정찰연대(FSR)가 조셉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의 사위가 운영하는 한 재단으로부터 17만 달러를 받은 사실이 확인돼 파장이 일고 있다. FSR은 이 돈이 기부금이며 쿠데타 모의와 관계가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조사가 진행될 경우 에스트라다 지지세력 상당수가 피해를 볼 수 있어 반발이 예상된다.

언론 탄압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다. 필리핀 경찰은 지난달 25일부터 유력지 데일리 트리뷴지가 2003년부터 좌익세력과 연계해 근거 없이 정부를 비난하는 기사를 게재했다는 이유를 들어 정간시켰다. 이와 관련, 필리핀 언론들은 아로요 정부가 언론에 재갈을 물려 독재정치를 하려는 의도가 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홍콩=최형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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