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關東 대지진 80주년 조선인 학살 현장을 가다] 6천여 원혼 위령비만 덩그러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6면

1일은 일본에서 간토(關東)대지진이 발생한 지 80주년이 되는 날이다. 한국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 식민통치 시절, 당시 일본 경찰.군대.민간인들은 공황(恐慌)을 이용해 소요(騷擾)를 도모한다는 모함을 씌워 일본에 있던 조선인 6천여명을 참혹하게 학살했다.

이날을 전후해 일본에서 뜻있는 한국인.재일동포들이 추모행사로 '악령의 역사'를 기억했다. 간토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의 진상과 현 상황을 알아본다.

"1923년 9월 간토대지진의 혼란 속에서 잘못된 책동과 유언비어로 6천여명의 조선인이 귀중한 생명을 빼앗겼습니다. 마음속 깊이 추도합니다."

일본 도쿄(東京) 스미다(墨田)구 요코아미초(橫網町)공원 안의 간토대지진 위령당 옆에는 이렇게 시작하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일조(日朝)협회 회원 일본인들이 73년 세운 것이다.

지난달 29일 오전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 연구의 선구자인 재일사학자 강덕상(姜德相.71)전 와코(和光)대 교수와 함께 공원을 찾았다.

"당시 이 공원에는 군복 공장이 있었는데 주변과 공장에 불이 나 일본인 3만8천여명이 숨졌어요. 그런데 이곳에서 화장할 때는 시체가 4만2천여구였어요. 4천여구는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인데 상당수가 조선인이었지요."

姜전교수는 어두운 표정으로 "이 공원에서 가까운 강에선 지진으로 다리가 무너졌는데 군인들이 조선인들을 그곳으로 끌고가 학살한 후 강에 버렸다"고 말했다.

공원 자료관 2층에는 간토대지진 이후 초등학생이 학교에서 그린 그림이 전시돼 있었다. 몽둥이를 든 자경단원 3명이 도깨비 같은 모습으로 조선인을 검문하고 때리려는 장면이었다. 그림 옆에는 여러 권의 원고지 뭉치가 있었다.

姜전교수는 "당시 학생들이 남긴 작문에는 '길에서 조선인 살해 등 글로 다 쓸 수 없는 비참한 장면을 보았다'는 등의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공원을 나와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 떨어진 지바(千葉)현 야치요(八千代)시에 있는 작은 절인 관음사로 발길을 돌렸다. 김의경(67) 공연문화산업연구소 이사장 등 '관동대진재 한국인희생자 추모회'회원들이 85년 9월 이곳에 높이 1m 크기의 '학살당한 조선인들의 넋을 달래는 종'을 세운 곳이다.

절 가까이 가자 자위대 나가시노(習志野)부대가 보였다. 간토대지진 당시에도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3천여명의 조선인이 수용됐다가 일부가 살해당했다.

절에 도착하니 민속학자인 심우성(沈雨晟.69)공주민속극박물관 관장이 3명과 함께 종루의 단청을 새로 칠하고, 부서진 곳을 손질하고 있었다. 沈관장은 18년 전 이 종루 제작을 총감독했었다. 우연한 만남이었다.

"종은 보신각종의 1백분의 1 크기로 축소한 것이고, 종루는 충남 홍성에서 만든 후 분해해 갖고 와 조립했어요."

沈관장의 부인인 김미령(金美鈴.50)씨도 직접 단청에 칠을 하고 있었다. 종루에는 '보화종루(普化鐘樓)'라고 씌어 있었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모두 평등하게 살라는 뜻"이라고 沈관장이 설명했다.

마침 그때 이 절 주지인 세키 고젠(關光禪.74)스님이 걸어왔다. 이 절은 그의 집안에서 대대로 주지를 맡고 있다. 沈관장은 "원래는 절 주변의 조선인 학살현장에 종을 세우려 했는데 정부 허가를 못 받아 어렵던 차에 주지스님의 배려로 절 안에 세웠다"며 감사해 했다. 세키 스님은 별로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2년 전 이렇게 증언한 바 있다.

"간토대지진 후 주변의 조선인들이 군대에 끌려갔다가 닷새 후 농민들에게 인수돼 돌아왔다. 그리고 절 부근 공유지에서 일본 칼로 살해된 후 구덩이에 매장됐다. 아버지가 59년부터 그 공유지에서 매년 공양을 했다. 그 후 마을의 한 노인이 찾아와 '조선인 학살자들을 공양하고 싶다'며 절에 위령 푯말을 세우고, 매년 9월 학살된 장소에서 위령제를 올렸다."

종루 부근에는 그 이후에 세워진 위령비와 위령탑이 한개씩 있었다. 위령비는 일본인들이 만든 '지바현의 간토대지진과 조선인 희생자 추도.조사 실행위원회'가 , 위령탑은 한국의 불교단체가 세운 것이다.

姜전교수는 "이 마을에서만 조선인 60여명이 자경단에 의해 살해됐다"고 말했다. 관음사 내 무덤에는 그 중 조선인 6명의 유해를 담은 항아리가 안치돼 있다.

학살된 조선인의 유골이 발굴된 장소는 절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었다. 주택가 가운데의 공터였다. 98년 9월 24일 이곳에서 발굴작업이 진행돼 6구를 찾아냈다.

姜교수는 "주민들이 학살 사실을 쉬쉬하다가 70년대 교사들이 지역 역사시간에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자료집까지 내면서 공론화됐다"며 "발굴 당시 일본 내에서 반발이 많았지만 주민들이 합의해 발굴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학살 사실을 알리는 어떤 표지도 없었다. 잡초만 무성한 공터에 불과했다. 일본인들로선 잊고, 숨기고 싶은 장소였기에 그랬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姜전교수는 "전국에 학살당한 조선인을 달래는 위령비가 14~15곳 있지만 아직도 발굴하지 못한 곳이 많다"고 말했다. 姜전교수는 "일본 정부가 지금이라도 사실을 인정하고 이런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도록 하겠다고 사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쿄=오대영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