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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네이버 공동기획] 468g 초미숙아까지, 16년간 1만 명 신생아 살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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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우리 시대의 멘토 ④  피수영 신생아학회 명예회장

피수영 대한신생아학회 명예회장은 1980년대 국내에선 불모지였던 신생아학을 개척한 명의로 꼽힌다. 그는 2011년 서울아산병원을 퇴직한 후 하나로의료재단 고문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장진영 기자]

피수영 대한신생아학회 명예회장은 1980년대 국내에선 불모지였던 신생아학을 개척한 명의로 꼽힌다. 그는 2011년 서울아산병원을 퇴직한 후 하나로의료재단 고문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장진영 기자]

‘(피씨가) 희성이긴 하지만 어찌하여 역사에 남은 이름이 그다지도 없었던가. 알아보니, 피씨의 직업은 대개가 의원이요, 그중에서는 시의(임금·왕족을 진료하는 의사)도 있었다는 것이다. … 의학을 공부하는 우리 ‘아이’는 옥관자는 못 달더라도 우간다에 가서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올 것이다.’

피천득 선생의 둘째 아들 #수필 속 ‘의학 공부하는 그 아이’ #미 유학 후 돌아와 신생아학 개척 #아버지가 항상 얘기하던 것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결국 사람 #고 이국주 교수와 인연 #아플 때 그분 진료 받으면 말끔 #흉부외과 지원하려다 소아과 선택 #의사 지망생들에게 한마디 #돈 벌려고 의예과 선택하면 안 돼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정신이 먼저

수필 『인연』으로 유명한 고(故) 피천득 서울대 명예교수가 1965년 발표한 수필 ‘피가지변(皮哥之辨)’의 일부다. 이 수필에 등장하는 ‘아이’가 피천득 교수의 차남인 피수영(74) 대한신생아학회 명예회장이다. 서울대 의대를 다니고 있던 수필 속 22세 의대생은 이제 산수(傘壽·80세)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마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의술을 배웠고, 한국에 돌아와 신생아학 분야 명의가 됐다. 미국에서 의사 생활을 시작해 2011년 서울아산병원에서 정년퇴임할 때까지 그의 손을 거친 미숙아만 1만 명을 훌쩍 넘는다. 2000년에는 국내 의료진과 함께 468g의 초미숙아를 성공적으로 살려내기도 했다. 퇴직 후 현재는 하나로의료재단 고문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중학교 졸업식 날 가족사진. [사진 피수영]

중학교 졸업식 날 가족사진. [사진 피수영]

1943년생이면 해방되기 2년 전에 태어났다.
“서울 종로 청진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경성제국대학 예과(현 서울대 사범대) 교수라 해방 후에는 중구 장충동에 있는 사택에서 살았다. 45년 8월 15일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가 나를 발가벗겨서 옷 대신 온몸에 태극기를 두른 채 목말을 태우고 거리에 나가 ‘만세’를 외쳤다.”
서울사대부속국민학교(현 서울사대부초등학교) 2학년 때 6·25전쟁이 발발했다.
“형(피세영·캐나다에서 사업 중)은 당시 외할머니 댁에 살고 있어 먼저 피란을 떠났다.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피서영·미국 보스턴대 물리학과 교수)은 다음해인 51년 1·4후퇴 때 피란길에 올랐다. 계속 걷기만 하니까 배도 고프고 지쳤다. 천안쯤에서 아버지가 보초를 서고 있던 영국 군인한테 초콜릿을 얻어다 줬는데 평생 먹어 본 초콜릿 중 가장 맛있었다.”
피란 중에 ‘사랑손님과 어머니’를 쓰신 주요섭씨 댁에도 머물렀다고.
“주요섭씨는 아버지와 상하이 후장대 선후배 사이라 친분이 두터웠다. 주요섭씨가 당시 부산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구에서 기차를 얻어 타고 부산으로 갔다. 그의 집에서 1~2주 정도 신세를 지고, 이후 부산 지역 초가집 단칸방에 세 들어 살았다. 옆방 사람이 미군부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가 얻어온 음식쓰레기 ‘짬밥’을 먹으며 연명했다.”
서울대병원 인턴 때 맹장수술을 집도하는 모습. [사진 피수영]

서울대병원 인턴 때 맹장수술을 집도하는 모습. [사진 피수영]

아버지가 서울대 교수였는데 생활이 많이 힘들었나.
“아버지는 전쟁 중에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피란 중 서울대가 임시로 열렸을 때 아버지가 대학입학시험 출제위원을 맡았다. 한 학부모가 ‘내 아이를 잘 봐달라’는 의미로 쌀 한 가마니를 선물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쌀을 받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판단해 손도 안 댔다. 시간이 지나 마당에 있는 쌀이 썩었는데 나중에 그것을 돌려줬다더라. 이렇듯 아버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올곧게 사셨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의미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도 그런 이유인가.
“의사의 중요성을 깨달은 일이 있었다. 여섯 살 때 열이 심하게 났는데 당시 우리 사택 건너편에 살고 있던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다. 서울대 교수 부인이었다. 그때 그분은 고열이 나는 이유를 ‘열대성 말라리아’라 진단하고 매일 주사를 놔줬다. 그래도 열이 내려가지 않자 아버지가 당시 종로에서 유명했던 ‘이병남 소아과’에 데려갔다. 그분의 진단명은 ‘재귀열’이었다. 같은 증상을 두고 다르게 진단을 내린 것이다. 그곳에서 일주일 치료를 받고 깨끗이 나았다.”
소아과학의 산증인인 고(故) 이국주 서울대 교수와도 인연이 있다고.
“이국주 교수는 아버지와 경기고 동창이라 친했다. 어렸을 적 아플 때마다 이국주 교수를 찾아갔다. 몸이 아프다가도 그분에게 진료받으면 깨끗이 낫는 게 신기했다. 그분 같은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원래 흉부외과를 지원하려다가 소아과를 택한 것도 그분의 조언 덕분이다.”
75년에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서울대 동기 125명 중에 70명이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선진 의료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다. 당시 미국에서도 월남전 때문에 군의관을 파견해 의사가 부족했다. 동기들은 일찍 군 복무를 마치고 유학을 갔는데 나는 서울대에서 레지던트를 하느라 군 입대가 늦어졌다. 군의관을 마치고 제대하니 전쟁이 끝났더라. 입대 전 신청했던 영주권만 확보해 놓을 생각에 미국으로 떠났는데 예상보다 오래 있었다.”
2004년 아버지 피천득 교수와 떠난 상하이 여행. [사진 피수영]

2004년 아버지 피천득 교수와 떠난 상하이 여행. [사진 피수영]

당시 국내에는 생소했던 신생아학을 한 계기는.
“원래는 소아심장학을 전공하려고 했는데 서울대병원장을 맡고 있던 홍창의 교수가 신생아학을 하라더라. 한국에 소아심장학을 하는 사람은 이미 많고, 신생아학 분야가 뒤처져 있다는 조언이었다. 서울대부속병원에 아동병원이 생기면 그곳으로 오라고도 했다. 그래서 신생아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95년부터는 서울중앙병원(현 서울아산병원)에서 일했다.
“홍창의 교수가 서울대병원에서 정년퇴임하고 나서 89년 문을 연 서울중앙병원 소아과 과장을 맡게 됐다.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는데 돈 문제 때문에 바로 한국에 오지 못했다. 서울 올림픽을 마치고 서울 집값이 수직으로 치솟을 때다. 미국에 있는 큰 집을 팔아도 서울에서 전셋집 하나 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미국에서 돈을 좀 더 모아 95년에 한국으로 오게 됐다.”
서울중앙병원에서 일한 지 1년 후 신생아분과를 만들었다.
“이전까지는 소아과에서 신생아 진료도 같이했다. 하지만 신생아 분야는 소아과와 다르다. 미숙아나 저체중아를 돌보는 분야다. 보통 임신해서 37주 미만에 태어나는 아이들을 미숙아로 분류한다. 이런 애들은 모든 장기 발달이 미숙해 호흡기질환이나 뇌출혈 등이 많다. 특히 28주 미만의 애들은 엄마에게서 항체를 충분히 받지 못하고 태어나기 때문에 감염이 잘된다. 세심한 진료가 필요하다.”
신생아과를 신설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인가.
“인큐베이터·신생아호흡기·산소분석기 등 의료기계를 최고급으로 들여왔다. 또 미국에서 같이 일했던 간호사 3명을 교대로 아산병원에 오게 해 3개월 동안 한국 간호사 40~50명을 교육시켰다. 그 외 소아외과·신경외과·안과·이비인후과 등과 협진체제를 이뤘다. 2000년에는 468g의 초미숙아도 살렸다. 2011년 서울아산병원에서 정년퇴임하기까지 16년 동안 아기 1만 명 정도를 살렸다.”
이 시대 젊은이, 의사 지망생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서로 배려하고 선의의 경쟁을 했으면 좋겠다. 의사 지망생들은 일이 적성에 맞는지 고민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돈을 잘 벌기 때문에 의예과를 선택하면 안 된다.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희생정신이 우선돼야 한다.”
인생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아버지가 항상 얘기하던 게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이뤄져 아름답다’는 것이다. 외과의사를 하려다 이국주 교수의 권유로 소아과를 했고, 소아심장학을 전공하려다 홍창의 교수의 권유로 신생아학을 하게 됐다. 두 사람과의 인연이 오늘날의 나를 만들었다.”
인생을 살면서 꼭 지키려고 했던 것은.
“항상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이다. 서울대 의과대학 2학년 때 교재 값을 부풀려 받았다가 걸린 적이 있다. 당시 대부분의 대학생이 그런 식으로 용돈을 마련했기 때문에 잘못된 행동이라는 생각을 안 했는데 오전 2시에 자는 나를 깨워 혼을 내시더라. 다음 날 시험이었는데 잠도 못 자고, 혼나느라 공부도 못해 결국 모든 과목을 재시험 쳐야 했다. 그때 이후로는 다시는 거짓말을 안 하고 살려 노력하고 있다.”

피수영은

● 1943년 서울 종로 출생
● 1967년 서울대 의과대학 졸업
● 1972년 서울대 대학원 소아과학 박사과정 수료
● 1968~72년 서울대 의과대학 부속병원 소아과 레지던트
● 1980~95년 미국 둘루스클리닉 신생아과 과장
● 1990~95년 미국 미네소타대 의과대 임상부교수
● 1995~2011년 울산대 의과대학 소아과 교수
● 1995~2001년 서울아산병원 신생아과 과장
● 2001~2002년 서울아산병원 소아과 과장
● 2002~2003년 서울아산병원 진료부원장
● 2001~2003년 대한신생아학회 회장
● 2003~현재 대한신생아학회 명예회장
● 2012년~현재 의료법인 하나로의료재단 고문

전민희 기자 jeon.mi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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