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처 PC 연 블랙리스트 조사위 … 일각 “영장 없는 압수수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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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법원행정처가 판사들의 성향을 분류해 관리했다는 의혹을 뜻하는 ‘사법부 블랙리스트’의 존재 여부를 재조사 중인 대법원 추가조사위원회(위원장 민중기 서울고법 부장)가 행정처 판사들이 사용한 PC 3대의 하드디스크를 확보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조사 대상 PC는 법원을 떠난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과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전·현직 기획심의관 2명이 사용한 것이다.

전·현 기획심의관 등 사용 PC 3대 #인사·예산 등 민감 현안 존재 가능성 #의혹과 무관한 내용 유출 우려도

법원 내부에서는 이 하드디스크를 두고 ‘판도라의 상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자칫 의혹과 무관한 법원 내부의 기밀 정보가 샐 수 있고, 판사가 사용한 컴퓨터를 사실상 강제로 들여다보는 것이 절차적으로 정당한 것이냐는 논란 때문이다.

이 전 상임위원과 전 기획심의관의 컴퓨터 2대는 김명수 대법원장의 보존 지시에 따라 행정처에 보관돼 왔다. 나머지 한 대는 현 기획심의관이 사용 중인데, 조사위는 지난달 29일 오후 이 PC의 하드디스크 2대를 디지털 포렌식 업체에 의뢰해 ‘이미징’ 방식으로 복제했다. 검찰이 범죄 혐의자의 PC를 압수수색할 때 주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하드디스크 전체를 복제한 것은 파일 삭제 여부를 확인하고 복원하기 위한 조치다. 이렇게 복제된 하드디스크도 2대의 컴퓨터와 함께 행정처에 보존 조치됐다. 조사위 관계자는 30일 “향후 (PC 조사) 절차와 관련해서는 행정처와 협의해 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은 사법행정의 컨트롤타워로 사법정책과 입법·예산 문제 등과 관련해 청와대·국회·법무부·기획재정부 등과 접촉하는 일을 한다. 또 법원의 인사정책 전반도 다룬다. 양형위 상임위원은 기조실장·사법정책실장 등에 버금가는 행정처 내 요직으로, 다양한 현안에 대한 정보를 다룰 수 있는 위치다.

이 같은 업무의 일부를 맡았던 판사들의 컴퓨터를 조사하는 것에 대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반대 입장을 밝혔다. 그는 지난 7월 법관회의 측의 컴퓨터 직접조사 요구를 거부하면서 “사법부의 내부 자료가 공개될 경우 그 파장이 크다”고 말했다.

법원행정처 고위직 출신의 한 원로 법조인은 “행정처 내부 자료가 만약 유출된다면 다른 기관에서 사법부를 어떻게 믿고 협력하겠느냐”고 우려했다. 익명을 요구한 수도권 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내밀한 자료에서 과거 법원행정처의 또 다른 문제점을 찾아내 사법부 내 ‘적폐청산’과 인적 물갈이에 활용하는 게 아닌지 걱정된다는 말들이 나온다”고 말했다. 하드디스크 복제 현장에는 현재 PC 사용자인 심의관은 입회했지만 다른 사용자들은 참여하지 못했다. 수도권의 한 지법 부장판사는 “사실상 영장 없는 압수수색에 가깝다. 사법부 스스로 영장주의를 위배했다는 내부 반론이 만만치 않다”고 지적했다.

이날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에 참석한 김소영 법원행정처장은 “PC 조사에 있어 해당 법관의 동의 없이 컴퓨터를 열어볼 수 없다는 게 행정처 입장”이라고 말했다. 법원 안팎에서는 김 대법원장이 판사 PC 조사에 대한 입장을 바꿨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해 김수천 부장판사의 뇌물수수 사건 때 김 대법원장(당시 춘천지법원장)은 피조사자가 감사관실의 자료 제출 요구를 거부할 수 없도록 하는 대법원 규칙 개정에 반대했다. 당시 전국 법관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다수였고, 지난해 9월 6일 소집된 법원장회의에선 다수 법원장들이 강하게 반대해 규칙 개정은 무산됐다.

수도권의 또 다른 부장판사는 “조사위 요구 이틀 만에 PC 복제를 허용한 것은 대법원장의 의중 없이는 불가능하다. 대법원장이 모순된 태도를 보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법관회의 구성원인 한 부장판사는 “선례가 되면 앞으로 작은 의혹에도 판사들의 책상과 PC를 강제로 들여다보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유길용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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