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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노 대통령의 등산복 … 원자바오의 점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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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통령이 4년차 임기를 시작하는 26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함께 북악산 산행에 나섰다. 이날도 대통령은 세련되고 멋진 등산복을 입었다. 물론 이전과는 또 다른 등산복이었다. 그동안 대통령은 수차례 공개적인 산행에 나섰는데 그때마다 대통령의 등산복이 달랐다. 세간에선 대통령의 등산복이 도대체 몇 벌인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마저 생겼다. 재킷은 물론 모자와 장갑도 매번 달랐다. 지난해엔 대통령이 산행 때 낀 선글라스가 너무 튀어 세간의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나중에 그것은 일명 '노무현 선글라스'로 불리기도 했다.

물론 대통령이 잘 차려입는 것을 탓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대통령이 멋져 보이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이 나름의 메시지이듯 그의 복장 하나하나가 국민을 향한 살아 있는 언어임을 간과해선 안 된다. '성공을 위한 옷차림'의 저자인 존 몰로이가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공인의 복장은 그 자체가 강력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최근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국무원 총리의 낡은 점퍼가 화제가 된 바 있다. 춘절(春節.설) 전날인 지난달 28일 원 총리가 산둥(山東)성 허쩌(荷澤)현의 농촌을 방문했을 때 입었던 빛 바랜 녹색 점퍼가, 11년 전인 1995년 겨울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산둥성 농촌마을 서우광(壽光)을 방문했을 때 입었던 것과 같은 옷이라는 사실을 한 중국 네티즌이 확인해 인터넷에 올린 것이 계기가 됐다.

그러자 "원자바오 총리께서 10여 년 전 겨울 점퍼를 아직도 입고 계신다" "주름 지고 해진 점퍼를 입고 계신 총리는 보통 노인과 다르지 않았다" 등의 무수한 댓글이 붙으며 원 총리의 낡은 점퍼 이야기가 인터넷을 통해 중국 전체로 퍼져나가 13억 중국 인민을 감동시켰던 것이다. 비록 세련미는 없었지만 중국 인민들은 원 총리의 그 낡은 점퍼를 통해 고단한 삶에 대한 위안과 더불어 이런 인물이 이끄는 나라에서 살기에 아직 희망이 있음을 느꼈다고 한다.

양극화 해소를 최우선 정책과제로 내거는 우리 대통령이 정작 산행 때마다 등산복을 갈아입고서 화려하게 변신하며 국민 앞에 나타나는 것과는 사뭇 비교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양극화 문제로 보자면 중국이 우리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원 총리는 소리 높여 양극화 의제를 들고 나오진 않았지만 낡고 해진 점퍼를 입은 그의 모습 자체가 중국 인민들에게 드리워진 양극화의 그늘을 걷어내고 그들에게 한 줄기 희망의 햇살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한 나라의 리더란 자고로 이래야 한다.

한 국가의 부는 그 국가를 이끄는 리더의 검약하는 자세와 무관하지 않다. 양극화 해소도 마찬가지다. 양극화 해소를 최우선의 국정과제로 내걸면서 "앞으로 누가 얼마나 더 세금을 내고 또 누가 얼마나 혜택 보는지 계산해 보자"며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대통령의 진정성이 국민에게 먹히려면 먼저 대통령 자신이 원 총리의 모습처럼 보여야 한다. 그래야 서민을 생각하는 모습, 양극화의 그늘을 진정으로 고심하는 모습으로 비칠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것은 쇼를 하자는 게 아니라 그런 마음가짐과 자세가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우리 사회의 양극화가 70~80년대의 불균형 압축성장과 국제통화기금(IMF) 위기의 후유증이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지난 3년간 폭등한 토지.아파트.주식 등의 자산가격이 1431조원에 달한다. 정작 실질적인 양극화가 극대화된 것은 참여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의 일이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양극화의 책임을 묻고 떠넘기기 이전에 대통령이 먼저 양극화의 그늘을 걷어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솔선해 보여 주어야 하지 않겠나. 승승장구하는 중국 경제와 원 총리의 낡은 점퍼, 그리고 여전히 주눅 든 채 양극화로 치닫는 한국 경제와 대통령의 변화무쌍하고 화려한 등산복. 이들 간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이제 독자께서 판단할 몫이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