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살가죽구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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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살가죽구두’-손택수(1970∼ )

세상은 그에게 가죽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네
맨발로 세상을 떠돌아다닌 그에게
검은 가죽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네

부산역 광장 앞
낮술에 취해
술병처럼 쓰러져
잠이 든 사내

맨발이 캉가루 구두약을 칠한 듯 반들거리고 있네
세상의 온갖 흙먼지와 기름때를 입혀 광을 내고 있네

벗겨지지 않는 구두,
그 누구도
벗겨 갈 수 없는
맞춤 구두 한 켤레

죽음만이 벗겨줄 수 있네
죽음까지 껴 신고 가야 한다네

착한 시인아, 부산역 광장에만 그 사내가 있는 건 아니라네. 땡볕과 새벽이슬과 찬비와 눈보라를 피할 만한, 하늘을 가릴만한 곳이라면 이 세상 어디에고 그는 잠들어 있네. 어머니가 있었다면 가마솥물 절절 끓여 박 속을 긁어내 듯 그 사내의 묵은 때를 다 벗겨내었을 것이네. 큰 빗으로 머리 빗긴 후 밥 한 그릇을 내놓았을 것이네. 그러나, 우리의 어머니는 어디에 계신가.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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