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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가 끝 아니다” … 거세질 미국 통상 압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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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미국 최대 유통업체 베스트바이 매장에서 직원들이 LG전자 세탁기 트윈워시를 소개하고 있다. [중앙포토]

미국 최대 유통업체 베스트바이 매장에서 직원들이 LG전자 세탁기 트윈워시를 소개하고 있다. [중앙포토]

“미국의 전방위적 통상 압력이 본격화했다. 앞으로 미국과의 통상 마찰 확산을 피하기 어렵다.”

ITC, 삼성·LG 제품에 고관세 권고 #120만 대 초과 물량에 50% 검토 #양사 연 200만 대 판매, 타격 불가피 #트럼프 취임 후 총 31건 수입 규제 #화학·가전·태양광 등 분야도 늘어 #FTA 유리한 개정 위한 전략 분석 #정부, WTO 제소 등 맞대응 나서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삼성전자·LG전자가 만든 세탁기의 일부에 대해 고관세율을 매기라는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권고안을 내놓은 데 대해 통상 전문가인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장은 이렇게 평가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자국 우선주의’를 반영한 통상 압박이 세탁기에 머무르지 않을 거란 얘기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에 대한 협상력 강화를 위해서도 미국이 한국에 대한 무역장벽을 더욱 높일 가능성이 커 대응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ITC는 21일(현지시간) 미국으로 수입되는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세탁기에 대해 세 가지 세이프가드 권고안을 내놨다. 완제품에 대해선 안이 2개다. 두 안 모두 120만 대 초과 물량에는 50%의 관세를 매긴다. 대신 120만 대까지의 세탁기에 대해선 무관세를 적용하는 방안과 20% 관세를 매기는 것으로 나눠졌다. 세탁기 부품과 관련해선 5만 대까지는 무관세를, 그 이상의 경우엔 20%의 관세를 물리는 안이 채택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권고안을 검토해 내년 초 세이프가드 적용 여부를 확정한다. 미국 가전회사 월풀은 미국으로 들어오는 두 회사의 모든 세탁기에 50%의 고관세를 적용해야 한다고 지난 5월 ITC에 요청했는데, 이보다는 낮은 수위다. 하지만 양사가 미국에 연간 200만 대가 훌쩍 넘는 세탁기를 수출하는 점을 고려할 때 권고안이 현실화하면 세탁기 수출의 타격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이날 권고안에 대해 “미국 내 소비자들의 선택권을 제약하고 미국 내 일자리 창출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공식 입장을 내놨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미국의 이런 무역 규제는 앞으로도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정부가 들어선 이후 미국은 인도와 함께 한국 수입품에 대한 규제국으로 떠올랐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으로 미국은 한국에 모두 31건의 수입 규제를 했다. 미국의 한국 대상 수입 규제 건수는 지난해 12월 기준 23건이었는데, 1년 새 8건이 늘었다. 단골 규제 대상이던 철강은 물론 화학·태양광·가전 등 분야도 확산되고 있다.

정인교 인하대 대외부총장은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강화 흐름을 보여 주는 것”이라며 “한국의 미국에 대한 무역수지 흑자 폭을 줄이고, 한국 기업의 미국 투자를 유도하기 위한 무역 규제가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미국이 무역장벽을 높게 쌓는 건 한·미 FTA 재협상과 연계돼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심상렬 광운대 국제통상학부 교수는 “한·미 FTA 개정 과정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주요 한국산 제품에 대한 무역장벽을 일제히 높이는 ‘패키지 전략’을 펼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등을 적극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산업통상자원부와 외교부는 22일 삼성전자와 LG전자 관계자가 참여한 가운데 회의를 열고 ITC의 이번 권고안에 대한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강성천 산업부 통상차관보는 “권고안이 시행될 경우 WTO 제소를 검토하겠다”며 “최종 결정이 나오기 전 미국 의회나 행정부, 주정부 등에 우리 입장을 적극 설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미 FTA 개정 협상 역시 미국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이날 한·미 FTA 개정 관련 농·축산업계 간담회에서 유명희 산업부 통상정책국장은 “한·미 FTA 폐기 옵션은 우리도 갖고 있다”며 “농업 분야의 추가 개방은 없다는 뜻을 미국에 표명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의 전방위 통상 공세가 워낙 심해 한국이 이런 ‘원칙’을 지켜낼 수 있을지 미지수라는 분석도 있다.

허윤 교수는 “‘강대강’ 전략을 통해 한국도 협상에서 얻어 낼 건 얻어 내야 할 부분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트럼프 정부의 보호무역정책에 손해를 보거나 반대하는 미국 내 정·재계를 아군으로 만들어 미국 정부에 부담을 주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허 교수는 “수출 대기업은 정부 대책과 별도로 회사 내에 통상조직을 꾸리는 등 심화될 통상 압력에 적극 대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세종=하남현 기자, 심새롬 기자 ha.nam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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