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최장집 칼럼

시민사회의 두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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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정치학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정치학

한국의 시민사회는 강력한 운동의 사회적 기반으로 민주화를 성취하는 데 기여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민주화는 권위주의 시기에 발달한 강력한 국가에 대응해, 또한 강력한 시민사회의 힘이 충돌하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1990년대 초반 하와이대의 사회학자 구해근 교수는 이를 두고 ‘강한 국가 대(對) 쟁투적 시민사회’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운동이 주도하는 시민사회를 강하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 나의 관점에서 한국의 시민사회는 보는 각도에 따라 정반대 성향을 나타내는 야누스적 얼굴을 갖고 있다. 그것은 강력한 국가에 비해 너무나 허약하고 자율성이 적어 실제로 민주주의를 작동시키는 데는 별로 기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시민사회의 강력한 운동은 #시민사회가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결사의 자유가 제한되고 #자기 이익을 조직화하는 기반을 #만들지 못한 상황의 결과물일 뿐

한국의 시민사회는 서구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서구에서 시민사회는 국가와 사적 영역의 개인 사이에 광범하게 존재하면서 양자(兩者)를 매개하는 중간 층위를 말한다. 여기에서는 사회적 기구와 조직, 이익집단을 포함하는 자율적 결사체들이 중심적 구성 요소이기 때문에 운동이 자리 잡을 공간은 협소하고 그 역할 또한 주변적일 뿐이다. 일찍이 19세기 프랑스 정치철학자 알렉시 드 토크빌은 민주주의를 정치체제가 아닌, 조건의 평등을 핵심으로 하는 사회적 상태로 정의한 바 있다. 그에게 조건의 평등은 자유로운 사회에서 수많은 결사체를 낳아 다원적 사회구조를 창출하고, 그렇게 분산되고 다원화된 권력과 사회경제적 자원은 다시금 개인 자유의 공간을 확대한다고 보았다.

한국 민주주의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그러한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결사의 자유가 크게 제한돼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분명 권위주의 시대가 남긴 유산이지만 민주화 이후에도 큰 변화 없이 한국 민주주의를 그 저변에서부터 제약해 왔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정확히 말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결사의 자유는 보편적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약자와 소외집단, 그리고 국가중심적 컨센서스에 이견을 갖거나 그 중심에 포섭되지 않는 집단이나 부문들에 대해 더욱 심각하게 제한되기 때문이다. 또한 결사체가 널리 허용될 때조차 그 취약성이 심각한 사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난해 ‘정유라 사건’으로 승마협회 문제가 드러나면서 체육계에 만연한 비리가 사회적 이슈가 됐을 때 한국 결사체들의 민낯을 생생히 볼 수 있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의 2000개가 넘는 단체들은 자율적 이익결사체라기보다는 정부 정책을 집행하는 관료적 하부조직 이상이 아니었다.

최장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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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사체의 취약성 내지 자율성 부재가 가져오는 부정적 결과는 실로 다양하고 심대하다. 우선 강력한 국가의 팽창을 억제하는 동시에 대통령으로의 권력 집중을 강화하는 힘에 대응하는 사회적 견제력을 발휘할 수 없다. 선출된 정부의 권력 행사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적 힘도 원천적으로 제약된다. 이 모든 것은 결국 국가 관료의 규모와 영향력 확대로 이어지고 그 결과로 국가권력의 권위주의화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

다른 한편 민주주의의 중심 기제인 정당의 힘을 약화시키게 되는 것 또한 필연적이다. 정당이 현재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는 사회경제적 문제와 그로부터 발생하는 이익 갈등을 둘러싼 구체적인 이슈와 사안에 대해 뚜렷한 대안을 갖고 대응하지 못할 때, 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갈등을 통해 대립하고 결집하는 자율적 결사체들은 정당의 사회적 기반이다. 그들이 취약한 까닭에 그들의 의사를 ‘대표의 직접성’을 통해 정책으로 구현하지 못할 때 정당의 역할은 약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갈등의 제도화는 민주주의에서 정당이 수행하는 중심 역할이다. 정당이 한편으로 경쟁하고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타협을 통해 협력하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핵심적인 사회경제적 이익 갈등을 풀어나가는 데 기여하지 못한다면, 정당이 민주주의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란 별로 없다.

이 모든 현상의 결과는 운동의 주기적인 분출로 나타났다. 한국 시민사회에서 운동이 발휘하는 특별한 효능은 결사의 자유가 제한되고 그로 인해 허약한 결사체들이 평상시에 사회경제적 생활에 기초해 자기 이익을 조직화하는 방식으로 시민사회적 기반을 만들 수 없었던 상황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한국 시민사회를 대표하는 운동의 특별한 역할은 시민사회의 강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민주화나 권위주의로의 퇴행을 막는 데 운동의 역할은 지대했다. 하지만 사회의 다양한 이익을 조직하고 표출하며 조율하는 역할까지 운동이 담당할 수는 없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