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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포항여고 선배 여기자가 수능 앞둔 후배에게 띄운 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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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백경서 기자가 21일 모교인 경북 포항여고 후배들의 교실을 찾았다. 프리랜서 공정식

중앙일보 백경서 기자가 21일 모교인 경북 포항여고 후배들의 교실을 찾았다. 프리랜서 공정식

지진 와중에 인생의 도전에 나선 포항여고 후배들에게.

나의 사랑하는 모교 포항여고 후배들에게 띄웁니다.

금나나(2002년 미스코리아 진)씨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본 연예인이었어. 2006년 포항여고 3학년 9반 교단 앞에 선 그녀의 당당한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당시 그녀는 경북과학고(포항 소재) 재학 시절 생물 과목을 가르쳤던 은사를 만나기 위해 포항에 왔어.
미스코리아가 된 뒤 의학에서 생물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세계 최고 명문인 미국 하버드대에 입학해 제2의 인생을 꿈꿨던 일, 좌절 속에서 또 다른 길을 걸어가는 과정을 당시 고3이던 나와 내 반친구들에게 차근차근 들려 주었지. 자리가 끝난 뒤 나는 친구들과 함께 "우리도 성공해서 꼭 모교 후배들을 찾아가자"는 다짐을 나눴던 기억이 나는군.
포항여고 졸업 이후 10년이 지나서야 그 작은 약속을 실천했다고 해야 하나. 의사나 성공한 사업가, 미스코리아는 아니지만…(호호).

21일 오전 단축수업으로 일찍 일과를 마친 포항여고 3학년 학생들이 학교하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 2017.11.21

21일 오전 단축수업으로 일찍 일과를 마친 포항여고 3학년 학생들이 학교하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 2017.11.21

나는 대한민국 역사상 두번째라는 규모 5.4 포항 지진 현장을 취재하러 온 중앙일보 기자란다. 1939년에 개교한 자랑스런 모교 포항여고 65회 졸업생이야. 현재 고3후배들이 76회일테니 나보다 꼭 11년 후배구나.

지진 발생 엿새가 지난 21일 오전에 모교 교정으로 오는데 멀리서 정문이 눈에 들어오자 만감이 교차했어. 약 10년만에 처음 모교를 다시 방문하는 상상을 어제 하면서 느꼈던 가슴 떨림보다 후배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
사실 지진 발생 이후 취재에 뛰어든 많은 기자들 사이에서 고3 수험생을 찾아 취재하려는 경쟁이 뜨거웠어. 그만큼 지진으로 연기된 수능이 큰 뉴스였거든.
하지만 솔직히 나는 선뜻 모교를 찾아올 생각을 하지 못했어. 아니, 하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지진 때문에 사상 처음 수능이 1주일 미뤄졌고 한밤중과 새벽에 벌떡 잠을 깨게 만드는 여진이 수십차례 이어지면서 심리적 혼란을 겪고 있을 우리 후배들에게 선배가 취재한다고 선뜻 다가가기가 좀 민망했거든.

21일 포항여고 앞 서점. 프리랜서 공정식

21일 포항여고 앞 서점. 프리랜서 공정식

그런데 오늘 큰 맘 먹고 용기를 내봤어. 이날 찾아온 학교 주변 전경은 10년 전이나 거의 변한 게 없더라. 포항에 눌러 앉아 사는 내 동창생들이 옛날 여고 시절 생각이 나서 가끔 찾는다는 분식집은 진짜 그대로야. 솔직히 당시에 공부는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문제집만 왕창 샀던 서점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어.

서점 문을 열고 들어서자 주인아주머니와 나는 한눈에 서로의 얼굴을 알아봤어. 아주머니는 "여기 졸업한 학생 맞죠? 아니 이렇게 오랜만에 무슨 일이야"라고 반갑게 묻더라.
따뜻한 손으로 냉장고에서 커피를 꺼내 내 손에 쥐여 주시더군. 한참 옛이야기를 나누다 "지금은 중앙일보 기자가 됐다"고 했더니 아주머니는 "(지진으로)수능 연기된 다음에 (포항여고)애들이 문제집 사러 많이 왔단다. 집이 많이 망가진 애들도 있을 테고, (수능 준비로 속 탈텐데 지진까지 발생해)그 속이 얼마나 더 탔겠니.후배들 힘내라고 좋은 기사 많이 써주면 좋겠다"라고 당부하시더군. 이렇게 서점 주인 아주머니도 진정으로 후배들 걱정을 많이 하시더라.

규모 5.4의 지진 피해를 입은 포항여고 3학년 교실에 선풍기가 떨어져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규모 5.4의 지진 피해를 입은 포항여고 3학년 교실에 선풍기가 떨어져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교정에 들어서자 학교 내부 곳곳에 지진 충격으로 금 간 흔적이 눈에 띄었어. 내가 공부하던 3학년 9반 교실은 천장재 일부가 떨어진 상태였어. 벽에 걸려있던 선풍기는 아직도 나뒹굴고 있었어. 지진이 발생한 날이 수능 예비소집일이어서 너희들이 교실 안에 없었던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측에선 고 3 교실의 피해가 가장 크다고 하시더군.

이날 하교 중이던 고3 후배 여학생 두 명을 만났어. 원자랑이란 예쁜 이름을 가진 후배는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수능 당일에만 시험에 지장갈 정도의 여진만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담담하게 말하더라. 참 어른스럽고 의젓해보였다.

포항여고 65회 졸업생이라고 내 소개를 했더니 또 다른 후배 여학생은 "선배님 취재 현장이 위험할 텐데 조심하시고, 날이 추운데 왜 이렇게 얇게 입고 다니세요"라며 도리어 내 옷깃을 여며줬어. 생각지 못했던 후배의 씩씩함에 내 눈주위가 뜨거워졌어.

규모 5.4의 지진 피해를 입은 포항여고 계단에 출입금지 통제선이 설치돼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규모 5.4의 지진 피해를 입은 포항여고 계단에 출입금지 통제선이 설치돼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사실 그동안 포항시 흥해읍 대피소 곳곳에선 공부하는 학생이 종종 눈에 띄었어. 수첩을 든 다른 매체 기자가 근처에 다가가기만 해도 "전 고2에요"라고 말하더라. 언론의 관심을 외면하고 싶었던 듯했어.
울릉도에 사는 고3 학생들은 해병대가 보유한 청룡회관에 묵고 있는 사실이 알려진 뒤부터 인근 다른 장소에서 공부한다더군. 매년 입시 때면 배를 타고 포항으로 건너와 시험을 보는 울릉도 수험생 34명의 이야기야.
너희들을 포함한 포항지역 전체 수험생 6098명 모두가 언론 보도에서 "(지진 이후)뒤늦게 공부하는 척한다" "누구 때문에 수능이 연기됐다"라는 댓글을 접할 때마다 누구보다 더 힘들었을 거야. 그런 말들에 너무 개의치 말았으면 좋겠다. "너희들의 잘못이 절대 아니다"라고 말해주고 싶구나.
행정안전부가 16일 공개한 공공시설물 내진 성능확보 현황(2016년말 기준)에 따르면 전국 학교시설 2만9558개 중 23.1%(6829개)만이 내진 성능을 확보했다더군.

중앙일보 백경서 기자가 21일 모교인 포항여고를 찾아 지진 피해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 2017.11.21

중앙일보 백경서 기자가 21일 모교인 포항여고를 찾아 지진 피해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 2017.11.21

철도와 항만·고속철도 등 기반시설의 내진율은 40~80%이지만 정작 자라는 학생들이 생활하는 학교시설은 77%가 내진 설계가 제대로 안돼 있다는 얘기야. 이번 지진에서도 유달리 학교 시설의 피해가 큰 이유이기도 하지.
 전문가들은 학교가 40~50년 전 벽돌로 지어져 내진보강이 쉽지 않다고 하는구나. 결국 지진에 제대로 대비하려면 신축이 불가피하다는 얘기지.

 이번 포항 지진으로 흥해초등학교가 건물 곳곳이 파손돼 아예 폐쇄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니. 포항여고 선배로서, 또 이제는 기성세대의 일원인 어른으로서 우리 사회를 더 안전하게 만들지 못해 미안하고 또 미안하구나.
 사실 2006년 수능을 치른 나는 한 때 수능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 수능 성적이 기대에 못미쳐 실망하고 울기도 했었지. 당시 내 일기장엔 스스로를 자책하는 이야기가 가득했어. 어른이 되어서 돌아보니 수능성적이 인생의 전부는 결코 아니었는데 말이야.

 23일이 수능날이구나. 지진을 겪은 이후 많은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트라우마를 호소한다고 들었어. 어른들도 힘든데 하물려 수험생이자 청소년인 너희들이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구나.

21일 오전 단축수업으로 일찍 일과를 마친 포항여고 3학년 학생들이 교문을 통해 나가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 2017.11.21

21일 오전 단축수업으로 일찍 일과를 마친 포항여고 3학년 학생들이 교문을 통해 나가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 2017.11.21

 하지만 인생을 살다 보면 더 많은 시련과 도전이 닥쳐온단다. 지진은 자연 현상이니 인간의 이성과 의지로는 대응에 한계가 있겠지만 최선을 다해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는 숭고하고 값지다고 생각해.

 수능과 지진으로 어수선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경구처럼 지금의 시기를 넘어서면 아마 먼 훗날 2017년 11월을 회상하는 날도 올거야.
 그때 너희들이 모교를 찾아와 10년쯤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구나.

  "나와 포항여고 동기들은 고3이던 2017년 11월, 규모 5.4의 지진과 수십차례 여진 와중에도 배움과 도전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마침내 수능을 치러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우리는 이렇게 어른이 되었다"라고.

 수능 당일 여진이 완전히 잦아들어 후배들이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유감 없이 발휘하길 기도할게.
 수능과 지진 이후 더 단단해지고 더 성장해 있을 후배들의 밝은 얼굴을 기대한다.
 사랑한다, 포항여고 후배들, 힘내라.

중앙일보 백경서 기자가 21일 모교인 포항여고를 찾아 지진 피해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 2017.11.21

중앙일보 백경서 기자가 21일 모교인 포항여고를 찾아 지진 피해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 2017.11.21

 포항=백경서 기자(포항여고 65회 졸업생) baek.kyungse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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