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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생명문화 포럼] 개인 가치 바탕 '생명학' 추구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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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세계생명문화포럼의 개최를 앞두고 김지하 시인과 임길진 미시간주립대 석좌교수의 대담을 마련한다.

국내 생명.환경 운동의 이론가로 꼽히는 김 시인은 세계생명문화포럼의 공동추진위원장을 맡았고,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이기도 한 임 교수는 이 포럼의 조직위원장이다.

두 사람은 대담에서 서양의 생태학과 구별되는 '생명학'을 제안했고, 이를 새로운 문화운동으로 발전시킬 뜻을 밝혔다. 생명학은 전체보다 개체를 중시하고, 개체의 다양성이 어울려 만들어 내는 조화를 지향한다고 이들은 말했다.[편집자]

대담을 시작하기에 앞서 임길진 세계생명문화포럼 조직 위원장은 "인류 문명의 놀라운 발전 뒤편엔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면서 "많은 나라들이 군비 경쟁을 하는 한편으로 1분에 40명씩 굶어죽는다. 하루에 2달러 미만의 비용으로 사는 사람이 수억명이다"고 했다.

이에 김지하 시인은 "선진국 언론은 기회있을 때마다 카오스 문제를 제기하지만, 그에 대한 명확한 대안은 없다"고 말을 받았다.

임위원장이 말을 이었다. "문명과 물질이 발전한 것 같지만 속으론 장기가 상해 있는지 모른다. 생명을 위협하는 환경파괴가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문화운동이 새로워져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가치혁명으로 생각을 바꿔야 한다." 여기서 김지하 시인의 '새로운 문예부흥론'이 나왔다. 다음은 두 사람의 대화다.

김지하=문예부흥, 아니 문화혁명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나는 유럽에서 나온 '생태학'에 대응해 '생명학'을 제안합니다. 생태학은 생명학에 포괄됩니다. 궁극적으로 동양과 서양이 힘을 합쳐 생명과 평화의 길을 찾아 보자는 것입니다.

임길진=생명학은 전체의 균형을 중시하면서도 개체 하나 하나에 더 많은 중요성을 둔다는 점에서 생태학과 차이가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독특한 인격을 바탕으로 세계적 공통성을 찾는 것입니다. 이를 '인간적 세계화'라 부르고 싶습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는 국제 기업, 강대국의 이익 추구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인간 개개인의 가치를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김지하=서양 철학에서는 군집.집체의 힘이 강합니다. 유럽 진화론의 발생학에서 봐도 개체보다 군집이 먼저 나옵니다. 종(種)이 발전해 개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발생 자체부터 개체를 중시하는 사상이 1860년 한반도에서 나타났습니다. 수운 최제우 선생이 계시를 받아 시작한 동학이 그것입니다. 그게 무슨 의미일까요. 개체가 중요하고, 개체를 통해 군집의 의미를 되새기자는 것입니다. 무수한 생태운동과 생명학이 다른 점이 이것입니다.

임길진=서양 생태학은 동양사상이 바탕이 되어 발전했습니다. 생태학 위기의 기반엔 서양 철학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퍼지며 인기를 끈 히피족.신비주의 등도 동양사상과 관련된 것입니다. 노자 '도덕경'은 영어로 수도 없이 번역된 베스트셀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동양의 자연 보존관을 동양인이 미리 발견하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학문적 사대주의는 문제가 있습니다. 생명학은 이 같은 과거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김지하=개체가 군집보다 먼저 발생한다고 보는 생명학은 '자유의 생태학'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개인의 목숨 안에 지구적 전체성이 들어 있습니다. 개인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생태학이 군집주의에서 개인을 존중하는 생명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임길진=인간이 올바른 일을 하게 하는 것은 도덕과 가치의 힘입니다. 무슨 가치를 믿고 있느냐가 행동을 결정하는 바탕입니다. 서양의 통치는 시장과 제도가 중심이고, 동양의 통치는 인치와 덕치가 중심입니다. 동양의 인간과 사회를 움직이는 기본인 도덕과 가치를 다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지하=5공화국 초반 내가 출감했을 때의 일입니다. 많은 이들이 5공을 비판하는 거대담론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찌 모두 보병만 만들려고 하느냐, 진짜 전쟁을 하려면 병참.전략사령부.포병.항공기 등 필요한 일이 많은데 어째서 폭동주의와 화염병 던지는 일이 다 인 줄 아느냐"고 했습니다. 내가 진정 하고 싶은 말은 생태학이 그 같은 경로를 밟아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생태 파시즘'의 가능성도 있고, 언제 내가 생태학을 했느냐는 식으로 대응하는 경향도 경계합니다.

임길진=문화운동이 명령계통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은 나치.홍위병시대로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것입니다. 생명을 존중하는 문화운동은 조직이 아닌 개체가, 수직적 명령이 아니라 수평적 마당에서, 외생적이 아니라 내부적 자발성으로 움직이는 것이 돼야 합니다.

김지하=생명학 실천은 지시하는 자가 없는 군중의 축제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과거에서 얻은 지혜와 문화를 현대로 미래로 끌고 나가기 위해 디지털 문화와의 결합도 필요합니다. 아시아의 고대로 문예부흥하면서 세계로 나아가는 문화혁신, 이 두 가지를 관통하는 어떤 새로운 문화이론이 나와야 합니다. 동북아 경제 허브를 추구하는 동시에 세계 문화의 용광로와 해방구가 돼야 합니다.

임길진=동물과 다른 인간의 특징은 새로운 이론을 만들고 실천하며 성공과 실패를 통해 발전하는 것입니다. 지난해 월드컵 때 '붉은 악마'현상을 보면서 느낀 것은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 개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전체주의 국가에서 대중 동원이 처음엔 잘 되다 안 되는 것은 재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문화운동은 생명학에 기반한 가치혁명에서 출발할 수 있습니다. 가치혁명은 농업혁명.산업혁명.정보혁명에 이은 제4의 혁명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시작해 세계로 전파해야 합니다.

김지하=최수운 선생이 제시한 주문의 마지막 구절이 '각지불이(各知不移)'입니다. "이 세상 사람이 떨어져 살 수 없으니 각각이 살 길을 궁리해 함께 살아가자"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동학 사상으로부터 도출한 또 하나의 생명학의 핵심 개념이 '모심'입니다.

임길진=최근 김지하 시인이 펴낸 회고록을 저에게 줄 때 '임길진에게 김지하 모심'이라고 쓰여 있더군요. 모심은 공평한 민주주주의적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어린이 문제도 '모심'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봅니다.

김지하=산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생명을 모시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모시는 것이고, 역사.인류에 대한 관심도 모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벌벌 기는 것이 모시는 것은 아닙니다. 연필이나 컴퓨터 같은 물건에 대해서도 모심이 있어야 합니다.

임길진=이런 관점에서 오는 12월 18일부터 사흘간 국내외 석학들이 모여 논의할 '세계생명문화포럼'을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새 시대의 화두인 생명.평화.상생에 대해 세계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정리=배영대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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