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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 사회 중심잡을 '원로 리더십' 발휘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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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진석(75) 추기경은 우리 사회의 중심을 잡아주는 원로(元老)의 리더십을 발휘할까.

한국사회에서 추기경은 가톨릭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정신적 지도자다. 그래서 새 추기경의 사회적 관심과 관점은 중요하다. 뉴라이트와 뉴레프트의 등장과 이들 지식인이 주도하는 역사 논쟁, 북한을 보는 시각 차이, 양극화에 대한 논란 등 사회적 이슈가 첨예한 상황이라 더욱 그렇다.

원로.지도자로서의 이미지는 김수환(84) 추기경이 만들어 왔다. 김 추기경은 1969년 서품 이후 격동하는 한국사회의 한가운데 섰다. 민주화 운동의 고비마다 중요한 역할을 했던 김 추기경은 98년 서울대교구장에서 은퇴한 이후 스스로 사회적 역할의 폭을 줄였다. 이후에도 간간이 목소리를 내오던 김 추기경은 22일 "이제 편하게 잘 것"이라며 신임 정 추기경에게 모든 짐을 넘겼다.

정 추기경은 원칙론자다. '생명과 인간애'라는 원칙이다. 확고한 신앙과 종교철학에서 비롯된 원칙이라 흔들림이 없다. 정 추기경은 김 추기경과 달리 교회 바깥 문제에 대한 발언을 매우 아껴 왔다. 청주교구장 시절 교회 일을 마치면 나머지 시간을 모두 교회법 연구에 쏟았다. 스스로 "교회와 교회법 외에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말할 정도다. 그러나 98년 김 추기경에게서 서울대교구를 물려받아 가톨릭을 대표하면서는 조금씩 말문을 열었다. 추기경이 되면서 목소리를 더 자주 낼 것으로 기대된다. 정 추기경은 22일 서품 소식을 듣고 몰려든 기자들에게 "천주교만 아니라 온 국민과 정부가 적극 밀어주신 덕분"이라며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추기경이 된 이후의 목소리도 기본적으로 생명과 인간애의 원칙을 벗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추기경의 생명 철학이 최근 표면화된 사례는 인간 배아 줄기세포 연구 반대다. 그는 "배아는 미래의 인간" "생명은 물질이 아니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추기경은 배아를 파괴하는 배아 줄기세포 연구를 "살인 행위"로 규정한다. 생명을 물질로 간주한다는 의미가 담긴 '생명공학'이란 말을 싫어한다. 추기경은 지난해 황우석 박사가 명동성당을 찾아왔을 때 "할 수 있다고 해서 무엇이나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경고했다. 같은 맥락에서 "인간의 탐욕이 재앙의 뿌리"라고 역설한다. 그는 "과학적 결과물이 나오면 반드시 악용된다. 인간의 탐욕이 악용한다"고 주장한다. 추기경이 발언의 수위를 높일수록 배아 줄기세포 연구보다 성체 줄기세포에 대한 연구 지원이 힘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인간애'란 측면에서 정 추기경이 관심을 쏟는 이슈는 북한 문제다. 북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다. 추기경은 성직자로서 공산주의라는 유물론.무신론을 근본부터 부정한다. 그는 "북한 주민들이 집단최면에 걸려 현실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 스스로 집단최면에서 깨어나야 한다. 북한에 식량 등을 지원하는 활동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인도적 취지의 지원이 공산체제를 지탱해 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우려다.

평양교구장을 겸하는 정 추기경에게 대북 선교활동은 매우 중요하다. 대주교 시절 추기경은 고(故)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알현했을 당시 "탈북자를 위해 뭘 하느냐"는 말을 듣고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천주교 민족화해위원회의 북한 지원을 동결하는 대신 통일동산에 탈북자를 위한 성당과 시설을 지을 것을 지시한 배경이다. 분단국가였던 독일 출신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한반도의 통일과 북한 선교에 관심이 많다. 교황은 정 추기경에게 상당한 후원과 독려를 할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선 교황의 북한 방문 얘기가 나오고 있다. 교황의 방문은 쉽게 이뤄지지 않겠지만 추기경이 북한과 관련된 정책이나 발언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추기경이 가장 높은 목소리를 내는 이슈는 사학법이다. 규제보다 자율을 강조한다. 그는 "한국 같은 통제 국가였다면 맹자의 모친이 세 번이나 이사를 못 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학생들에게 학교 선택권을 주면 사학 비리도 없어진다"고 주장한다. 학교 선택권을 가진 학생들이 비리 사학을 기피할 것이란 이유다. 그가 사학법을 반대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전교조다. "자신 있는 교사는 교원 평가를 거부하지 않는다"며 "전교조가 변질됐다"고 주장한다. 국회는 여야 합의에 따라 사학법 재개정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정 추기경의 강한 반대 입장이 이전보다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정 추기경은 원칙을 강조하는 만큼 보수적이고 완강하다. 김 추기경과 많이 다르다. 김 추기경은 68학생혁명의 전조가 일렁이던 독일에서 사회학을 전공했고, 정 추기경은 로마에서 교회법을 전공했다. 김 추기경은 20세기의 민주화와 개혁을 뒷받침했다. 정 추기경은 복잡하고 다양한, 그래서 분열과 갈등이 심한 21세기에 보다 근본적인 원칙론을 부르짖을 것이다. 바로 "화해와 일치를 통해 공존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호소다.

정 추기경은 서임 이튿날인 23일 교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다시 한번 '옴니버스 옴니아(모든 이에게 모든 것)'란 사목 표어를 설명했다. "각자가 자기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에게 선익(善益)이 되는 삶을 살면 사회 전체가 복된 공동체가 된다. 사랑은 나눌수록 커진다."

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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